어김없이 연말이 왔다. 10대에는 티비 연예대상 프로그램 중간에 나오는 제야의 종소리 카운트다운과 함께 새해를 벅찬 기분으로 맞이했고 20대에는 친구들과 함께 호프집에서 한 살 한 살 무르익어 가는 나이를 자축했다. 30대는 속도부터 다르다. 점점 연말이라는 한 해의 막바지가 제곱미터 속도로 빨리 오는 것 같다. 이렇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검색해봤더니 실제 이러한 이유의 연구결과에 대한 가장 최근의 뉴스를 찾아볼 수 있었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887719.html
요약하자면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 `시계시간'(clock time)과 마음으로 느끼는 `마음시간(mind time)이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마음의 시간은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런 이미지를 습득하고 처리하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아이들의 경우 이미지를 빨리빨리 처리하느라 점점 더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끼고 즐길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 별로 새로울 게 없으니까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대로 비유를 하자면 똑같이 한 차시가 주어지는데 빠른 학습자는 주어진 시간 내에 과제를 척척 해내면서 알찬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고 느린 학습자는 몇 개 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버렸으니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평소 나는 무뚝뚝한 딸이자 며느리이다. 우리 집에서는 나 혼자 잘나서 나 혼자 알아서 잘 큰지 아는 방임형 제멋대로 딸. 시댁에서도 꿀리는 거 하나 없다고 기본도리만 하면 된다는 주의의 철없는 냉정한 며느리. 전화도 자주 안 드리고 특히 친정에는 필요할 때만 연락해서 할 말만 하고 끊는 천하의 별로인 딸이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니 연말도 다른 기념일과 같이 으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시즌이 되었다. 그러한 의무감을 가지고 12월이 되자마자 재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처럼 시댁과 친정을 진즉에 한 바퀴 돌았더랬다. 시어머니는 평일에 겨우 하루밖에 안 쉬는 일을 하시기에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주말에 시아버님만이라도 뵈고 조촐한 저녁을 한 끼 하는 최선의 도리를 행했다. 친정은 친정아버지 쉬는 날에 맞추어 오전 일찍 얼큰한 감자탕도 먹고 식물이 그득한 카페에 가서 담소도 나누면서 오후에 또 우리 가족만의 시간을 남겨두었다.
그럼에도 연말에 이어지는 한파로 기나긴 겨울이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시부모님은 이 추운 겨울 아파트에 사시면서도 관리비 아끼신다고 보일러지 트시지 않는다. 친정부모님은 30년 넘은 노후 주택에서 바람이 솔솔 새는 낡은 새시와 겨울이면 얼어버리는 기름보일러에 의존하시면서 덜덜 떠시면서도 뭐가 춥냐면서 너스레를 떠신다. 반면 새 아파트 우리 집은 남향 고층에 낮에 들어온 따스한 햇살로 보일러를 거의 틀지 않아도 되는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내 체온이 따뜻할수록 주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님과 근검절약하시는 시부모님이을 생각 하니 마음 한편이 계속 차가웠다.
평소 외식은 일절 안 하시는 시어머니가 유일하게 쉬시는 평일날, 전화 한 통을 드렸다.
"어머니, 오늘 쉬시는 날이시죠? 집에서 밥 하지 마시고 연말이니 아버님이랑 맛난 음식 사드시라고 용돈 조금 부쳐드렸어요."
" 아이고, 고맙다. 꼭 맛있는 거 사 먹을게. 다음부턴 돈 부치지 말고 절대. "
"네(대답만)"
추위를 가장 많이 타시면서도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가장 많이 몸부리 치시는 아버지를 위해 포근한 옷 한 벌 사이즈 맞추어 사드렸다.
"아빠, 안 추워요?
"뭐가 춥니? 하나도 안 춥다."
"그래도요. 요즘 유행하는 따뜻하고 편한 옷이니까 일할 때도 입고 집에서도 입어요"
"..........."(경상도식 무음은 예스라는 의미)
어김없이 연말에만 효녀 노릇하는 내 자신도 찾아왔다. 잠시 추위가 주춤해진 만큼 우리네 마음도 한편 따듯해질 수 있는 일들이 마구마구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