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월 1일의 일기
나는 내가 최초로, 오롯이 나의 힘으로 아이디를 만들던 순간을 기억한다. eochlxk + 숫자열. 숫자에는 그렇다할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대최타’로 번역될 수 있는 영어 문자열은 6학년 음악 시간에 뿌리를 박고 있다. 내가 수업시간에 배운 건 ‘대취타’라는 전통악례였고, 내 아이디는 ‘대최타’였으므로 정확히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 배운 음악시간의 내용과 그 내용을 대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13살의 오인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만큼 확실한 정체성이 어디있을까. 그 당시의 비밀번호에는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가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바뀌게 된다. 중학교 시절 친구에게 서든어택 아이디를 얻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전해받았던 비밀번호가 내 비밀번호가 된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자열이었지만, 모든 최초의 비밀번호가 그랬듯 누군가에게는 의미있는 문자열이었을 것이고, 다만 나와 그 라는 정체성의 단절이 비밀번호를 오히려 강력하게 탈바꿈해준다는 생각 덕에 그 비밀번호는 내 이름이 포함되었던 문자열을 대체하고, 내가 주력으로 사용하는 비밀번호가 되었다. 언뜻 보면 의미없는 문자열이겠지만, 그 건네받은 비밀번호에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압축되어있다. 이토록 내밀하고 개인적인 비밀번호가 어디 있는가. 심지어는 그 당시 비밀번호를 되찾기 위해서 우리가 대답해야 했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 초등학교 시절 당신의 첫 선생님은? 당신이 태어난 고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이름은? … 그러니까 우리가 인터넷 상에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현실의 나와 일치해야 된다는 것을 증명해야했고, 인터넷 상에서 아이디(정체성)를 만들고 패스워드를 지정하여 나의 대리인을 생성해내는 과정은 타인의 것과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기억’이라는 고유한 근원을 담보로 걸어야 했다. 인터넷이 보장하는 익명성은 언제까지나 인터넷 상에서 대면하게되는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이었을 뿐이고, 그때까지는 ‘ID’라는 단어는 뜻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
(나는 동일한 기억만 가질 수 있다면 구현되는 형태가 어찌되었건, 어떤 조건에서 생존하건 간에 그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유하지만 한편으로 단순한 수열의 조합은 폭증하는 기계적 연산 능력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개인의 내밀한 경험과 결부된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조합은 타인에게는 수수께끼 그 자체이겠지만, 수학적 관점에서는 단순한 조합의 문제다. 알파벳 26개와 숫자 10개의 조합. 만일 사람의 일반적인 습관을 조건에 추가한다면, 그 경우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우리의 내밀한 기억을 상징하는 문자열의 상징성은 박탈되고, 우리의 정체성은 탈취될 것이다.
이는 마치 침팬지가 무작위로 골라 누른 자판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완성시킬 확률을 떠올린다. 확률이 매우 낮아도, 정말 많은 수의 침팬지를 동원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률의 문제. 우리의 비밀번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지만, 무한히 많은 수의 침팬지가 동원된다면, 우리는 침팬지의 무작위적인 자판 두드리기와 동일한 기억을 갖는다. 침팬지의 노동과 우리의 경험이 교환되지 않는 추상적 가치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문자열로 표현되어 우리를 전혀 모르는 타인 앞에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그건 완전히 동일한 결과물일 뿐이다. (오히려 침팬지가 쓴 쪽이 더 충격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무자비한 연산 기계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기억을 잃어야 한다. 기억은 무한히 많은 침팬지 앞에 놓인 고작 10자짜리 문자열일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마저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비밀번호는 왜 불가능한가? ‘대최타’라는 내 아이디에는 6학년 음악 수학시간에 배운 전통 악례 대취타에 감명받은 한 어린이의 어리숙한 기억력 덕에 탄생한 유일무이한 아이디-이 아이디는 단 한 번도 중복되었다는 메세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라는 헤프닝이 있지만 그것에 (말 그대로) 좆도 신경 안 쓰는 시스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더이상 내 기억 따위는 내 정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내 정체성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로그인해고선, 되고 싶은 정체성을 상징하는 무지막지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업로드한다. 익명성의 공간이 보장하는 건 얼마든지 새로쓸 수 있는 정체성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 공간이 손바닥 뒤집듯 간편한 가변적 정체성의 공간으로 변해버린 건, 타인을 서슴없이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인 익명성의 공간이 된 건,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디렉션 : 슬프다기보다 무미건조한 톤으로) 기억은 나약해지고, 뒷전으로 밀려나고, 내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내 진짜 정체성은 불필요해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야 인터넷 공간에서 더 강력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의미한 걸 견디기 힘들어 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내 신원 확인 과정을 위임한다. 이제 나는 아주 유능한 대변인을 두었고,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과정은 온전히 그의 소임이 된다. 나를 대리하는 기억장치는 신분을 확인해달라는 시스템의 요구에 나 대신 이렇게 속삭인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교 6학년 음악시간에 xYy25-02!xGG-93&2sL라는 궁중 악례를 배우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