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2월 30일의 일기
제목의 문장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나는 연말이라 부를 법한 며칠의 기간 동안 꽤나 가라앉은 삶을 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어진 삶을 살았지만, 매 순간 누군가는 소멸해가고 고통받는 와중에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는 그에 대한 어렴풋한 대답이다.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애도한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산 자들은 죽은 자를 구원에 들게 할 수 있을까? 다시 묻자면, 나는 애도함으로써 그들을, 죽은 자를 구원하려는 것일까? 같은 종으로 태어나 동일한 시공간 속에서 운명을 달리해간 그들을 애도하는 건 왜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삶이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모든 죽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특히나 폭력적인 죽음이나 비극적인 죽음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은 우리가 불가피한 운명을 공유한다는 두려움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일까? 우리는 죽어간 자와 나를 치환할 수 있을 만큼의 상상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동일한 종류의 폭력과 비극에 쉬이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애도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너무 곁눈질 같은 애도가 아닌가.
한강 작가는, 산 자가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냐는 물음에 곧장 질문을 뒤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라는 한 야학교사의 말은 우리에게 환경처럼 주어진 삶의 조건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지를 드러낸다. 몇 십 년 전 폭력은 그의 양심을 찔렀고, 지금은 그의 문장이 우리의 양심을 날카롭게 찌른다. 대지로 흘러든 누군가의 피는, 순수한 물로 기화되어 대기의 일부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비로 내리고, 대지를 적신다. 한동안 폭우처럼 내리던 비구름이 걷힌 뒤엔, 늘 환한 빛이 뒤따른다.
최근의 사건들이 광주에 가해진 폭력에 비견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삶을 쥐고 흔들기엔 충분할 만큼, 걷잡을 수 없는 연쇄처럼 작용한다. 이 모든 걸 헤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영혼이 육신을 잃었고, 너무나 많은 존재가 고통에 잠겨들었다. 나에게는 뒤틀린 양심이 있어 때로는 타인의 웃음조차 거슬린다. 누군가는 쉬이 말하고, 쉬이 넘기지만, 그렇게 쉬이 뱉어지고 넘겨질 영혼들이었을까, 하고 되묻는다. 그리하여 문장은 다시 한 야학교사의 일기로 돌아온다. 누구나처럼 죽음을 기꺼워하지 않는 평범한 존재였던 야학교사 박용준. 그는 죽음도 불사하는 영웅이 아니다. 다만 남보다 단단한 양심이 있어 죽음을 불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에 빚진다. 무한히 오래된 사건과도 우리는 털끝만큼 무관하지 않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죽은 자들에게 빚진다. 다만 그들이 가진 것이 빛 뿐이라, 우리가 빚진 건 빛일 뿐이다.
눈부시게 환한 햇빛 아래에서 나는 찌르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그건 과거가 현재를 구원하는 빛이었고, 따끔거리는 건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된 금실로부터 전달되는 양심의 가책이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과 무기력하게 연결되어있고, 그리하여 시공간이라는 초월적인 벽마저 넘고서 우리에게 닿는 연결을 감각한다. 감은 눈꺼풀 위로 온기를 전하던 볕은 눈을 뜨는 순간 우리를 날카롭게 관통하고 잔상을 남긴다. 그리하여 과거는, 존재의 연결을 감각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현재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한다. 나는 우울을 베어문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