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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그리고 어쩔수가없다

스포 있음

by 언씨

1. 은중과 상연


태어나버렸단 생각을 항상 했다.

그래서 좋다 싫다의 문제는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단 한 명의 신생아도 그가 태어나길 원해서 선택한 경우는 없단 이야기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오로지 타인인 부모의 결정에 의해 겪을 수밖에 없었단 이야기다.


한 어린아이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감상과 가치관은 곧장 그 아이의 세계가 되어 전 인생을 관통하게 된다.

누구도 원망할 수는 없다. 탓을 돌리고 싶은 어른도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므로.

그렇다면 어떻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상연은 그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버튼을 누르는 방식을 택했다.

삶은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 부여받았지만

죽음은 본인이 오로지 결심하여 행했다.


상연은 절대 은중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약한 뿌리를 가진 나무는 튼튼한 나무를 가진 나무의 열매보다 품질 좋은 과일을 열리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땅에 깊숙이 묻혀있는 뿌리의 건강상태는 겉으로 볼 때 티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폭우나 전염병이나 벌레의 공격 같은 외부 자극을 맞이할 때 여실히 드러난다.

튼튼한 뿌리의 나무는 견뎌내는 힘이 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레 뿜어져 나온다.

뿌리를 뽑아서 다시 심기 전까진 두 나무는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다.

상연과 은중은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뿌리가 약할 수도 줄기가 다소 얇을 수도 이파리가 힘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타적인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상연의 영화사 제비가 작가 은중의 성공보다 훨씬 대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면 안 된다.

절대선과 절대악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삶은 단면이 아니라 수만 가지의 입체적인 다면성의 모양을 하고 있다.

누구도 어떤 사건에 감히 쉽게 단언하면 안 된다.


상연과 은중은 두 여성의 일대기를 풀어놓은 작품이었고

어떨 땐 청춘물이다가 어떨 땐 멜로물이다가 어떨 땐 진한 우정을 보여주는 워맨스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출산과 양육의 어려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숙고해보게 하는 드라마였다.

또 지긋지긋한 애증같은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운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이드를 주는 드라마기도 했다.


나의 내면은 은중에 가까울지 상연에 가까울지

나의 외면은 타인의 관점에서 은중에 가까울지 상연에 가까울지

나의 추구미는 은중에 가까운지 상연에 가까운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규정짓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어찌 됐든 뻔한 신파가 아니어서 좋았다.



2. 어쩔수가없다


바로 위에서 은중과 상연을 리뷰하며 한 인격체를 나무에 비유했다.


하지만 인간은 나무가 아니다.

인간은 그마저도 꺼져가는 제지산업에서 베어지고 심어지고 다시 잘려나가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처럼 취급되어선 안된다.


같은 맥락으로 과거에 만수의 아버지가 돼지 몇만 마리를 생매장했던 과거와 같이

인간은 필요에 의해 대량살상을 당하는 돼지처럼 취급되어선 안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서 며칠 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매일 장화만 신는 만수의 딸이 개집에 들어가 종일 누워있는 이유도,

틀을 깬 댄스파티의 커플의상도, 염혜란의 해독방식도, 이성민이 벌레가 들끓는 배나무를 방치했다는 사실도,

만수의 딸이 돌아온 가족 구성원에게만 첼로연주를 들려주는 것도, 아들이 비를 뚫고 하필 아이폰을 훔친 이유도,

다시금 찾아온 낙원에서 목재들과 함께 출근하는 만수의 모습도

계속 떠올랐다.


어쩔 수가 없다.


아니, 사실은 어쩔 수 없지 않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어찌할 바 없이 내 손을 떠난 경우가 많은 듯 하지만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어찌어찌 어떻게라도 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만큼의 적극성과 전복하고자 시도하는 마음을 먹는 것이 꽤 귀찮아서, 어느 정도 불편해서, 그리고 쉽지 않아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무마해 버리고 만다.


인간은 나무처럼 본디 나 있는 방향을 조정하고자 철쇠로 억지로 동여매면 결국에 부서지고 끊어지게 되어있다.

인생은 커다란 순환의 연속이지만 내가 서있는 방향을 잃으면 안 된다.


박찬욱의 영화를 보다가 깔깔 웃은 적은 처음이었고,

이병헌의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이라던가 염혜란과 이성민의 미친 케미라던가

슬랩스틱 같은 살해장면에 깔리는 조용필의 트로트는 너무너무 좋았다.


띄어쓰기하지 않은 제목의 의미 같은 미처 다 발견하지 못한 박찬욱의 트릭들을 찾고 싶다.

극장에서 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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