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
*본 소설은 허구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학교, 학원 이름, 인물 등은 실제 사건과 관계없습니다.
뉴욕에 있을 땐 최대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노력했다.
한인타운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남자들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나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다 보면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종범이와 결혼을 하고
아린을 낳은 이후엔
자꾸 어릴 적 생각이
머릿속으로 다시 밀고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와인 한 모금과
수면제 한 알을 먹고
잠이 들 때까지 눈을 감고 있으면
어느새 생각은 30여 년을 거슬러 가고 있었다.
과외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의 교육열은 법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학원의 교습 시간을 행정명령으로 규제하면
학원들은 문을 잠그고
외부에서 보이는 교실은 전부 불을 끄고
제일 깊은 안쪽에 모여서
늦은 시간까지 수업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아이들을 공부시킨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 학원을 오히려 더 잘된다.
독재정권이 과외를 금지했던 시절,
아파트 입구에는 과외를 단속하는
경찰차가 지키고 있었다.
과외 선생들은 카세트테이프에 수업 내용을 녹음해
경찰 단속의 눈을 피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다니며 테이프를 팔았다.
혹시나 경찰이 붙잡고 묻기라도 하면
볼펜을 팔고 있다며 가방 속 한가득 담긴
볼펜을 보여주곤 하였다.
진짜 볼펜을 판 건 사실이었다.
다만 진짜 알맹이는 볼펜 밑에 있는 테이프였다.
그렇게 같은 집에 매주 같은 볼펜을 팔고 또 팔았다.
H 원장은 그 시절부터 과외를 했다.
영어를 가르치던 아빠와 H 원장은
서로 과목은 달랐지만 마음이 잘 맞아 가깝게 지냈다.
아빠와 H 원장은 연지의 집 식탁에 앉아 종종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수입은 계속 있는데
세금을 낼 근거가 없으니
과외만 하면 이게 참 곤란해.
집도 사고 해야 하는데.
그래 과외로만 버는 건
또 혼자만 뛰어야 하는데
한계가 있지.
과외 금지가 풀렸지만,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 H 원장은 학원을 차리기로 했다.
연지의 부모님이 학원을 알아보았던 부동산을 소개해주었다. 연지 부모님의 영어학원과 같은 건물 같은 층 옆자리에 수학학원을 냈다.
아이고, 이 새대가리들아.
눈 좀 크게 뜨고 문제 제대로 봐봐라.
점잖기만 한 연지의 부모님과 달리 어쩐지 약간 날티나는 외모와 말투의 H 원장 강의는 남학생들이 특히 좋아했다.
서구적이고 훤칠한 외모 덕에 학부모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학원 상담실에는 늘 상담을 하겠다며 찾아온 동네 엄마들이 한두 명은 꼭 앉아 있었다.
안정지향 주의인 부모님과 달리 공격적으로 세를 확장하는 성격의 H 원장은 이곳에 학원을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대치동에도 학원을 차렸다.
대치동에 해도 되겠어?
대치동이라고 뭐 별거 있나요.
잘 가르치면 학생은 다 붙게 되어 있죠.
평생을 대출이라고는 몰랐던 부모님과 달리 은행 대출을 잔뜩 받아 과감하게 학원을 차린 H원장에게 부모님은 진심 섞인 걱정하는 말을 건넸지만 정작 H원장 본인은 담담했다.
자신만만한 태도 덕분이었을까.
대치동에 학원을 차린 지 채 1년도 안 되었을 때 근처 남자 고등학교의 전교권 학생들이 팀을 이루어 들어왔고 그 이후에 학원은 대치동에서조차 급격한 상승세를 탔다.
공부 잘하는 최상위권 아이들이
팀을 짜서 들어가는 학원.
그거면 학원 홍보는 따로 할 것이 없어진다.
동네에 그냥 탄탄한 영어학원 정도로 만족했던 연지의 부모님과 달리 H 원장은 학원 세를 공격적으로 확장해나갔다.
서울대 나온 거 아무 소용 없다니까.
박사 아무 소용 없는 거랑 똑같지.
그래 H 원장 봐.
서울대는 커녕
대학 어디 나왔는지도 모르는데
서울대라고 뻥치고 다녀도
잘 가르치니까 저렇게 잘 되잖아.
당신도 그냥 박사라고 할 걸 그랬나 봐.
당신은 학위만 못 딴 거지
그래도 그 대학 다니긴 했잖아.
술을 못 마시는 엄마는 아빠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라 다시 채웠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간이 작아서
그렇게 거짓말하면서는 못하지.
아무튼 대단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천상 학교 선생이 체질인데
H 원장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학원 운영해야 하는 것 같아.
좋게 말하면 사업가고
뭐 장사꾼인 거지.
업종이 학원인 거고.
사기꾼과 사업가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야.
아빠는 가득 채운 소주잔을 꺾어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래, 사업하는데
어느 정도 과장 안 섞인 사람 있나.
원장이 학벌만 속였지,
그래도 수업 하나는 기똥차게 하잖아.
맞아, 잘 가르치면 됐지.
학원 선생이 그거면 됐지.
H 원장을 진심으로 아끼면서도 부러움과 자조가 섞인 대화를 부모님은 종종 나누곤 했다.
잠들기 위해 한 잔씩 마시던 와인은 한 병을 넘어선 지 오래고 한 알씩 먹던 수면제는 두 알을 넘어 세 알을 먹기 시작했다.
의사는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지 말라고 했지만 요즘 그럴 수 있는 현대인이 있을까.
약 기운과 술기운이 섞여 몽롱한 상태로 핸드폰을 잡고 인스타그램을 켰다.
제일 첫 피드에 뜬 낯선 계정에 눈에 띄는 익숙한 책이 보였다.
라이언마마의 책이었다.
최근에 출간되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엄마표영어 교재에는
오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고 싶었는데
이 책을 읽고 아이에게
잘못된 표현을 가르쳐줄
수많은 마미님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네요.
제가 찾은 오류가
무려 총 158개입니다.
영어교재 출판이란 걸 하면서
제대로 된 원어민 검수도 안 받은 건지..
한국에서 아이들 영어 지도하셨다는 분인데
제대로 된 경력이 맞긴 한 건지.
저로서도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분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서로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요.
단지 이로 인해 잘못된 표현을 사용하게 될
마미님들과 아이들이 걱정되는 마음에 올립니다.
#엄마표영어 #올바른엄마표영어를전합니다#호주엄마영어
#엄마표영어 라는 해시태그를 팔로우했더니 매일 처음 보는 엄마표영어 인플루언서라는 사람들의 피드가 떴다.
각자 외국에서 몇 년 생활했다는 둥, 현재 영어권 국가에 살고 있다는 둥, 혼동하기 쉬운 영어 표현을 알려주겠다는 둥, 미국 학교 생활을 보여주겠다는 둥
본인들은 특별하다지만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피드들이었다.
오랜만에 눈에 띄는 피드였다.
게다가 라이언마마 책에 대한 내용이라니.
누가 봐도 까는 글이면서 대의 앞세우기는.
또 어떤 관종인가 한 번 볼까.
계정 이름을 클릭했다.
호주엄마
시드니 거주 16년, 현재 경남 양산 거주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건강한 엄마표영어를 전합니다.
파닉스 교재 공구 진행중
16년이면 뭐 지도 거기서 태어난 것도 아니네.
언어학자도 아니고 무슨 오류 타령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지도 책팔이면서 고고한 척은.
좀 다른가 싶은 기대감과 달리 보자마자 지루함이 밀려왔다.
피드를 쭉 내리자 원래 남까는게 취미인 것마냥
여기저기 영어교재 등 전반적으로 자주 저격한 것이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건 무엇보다 다른 엄마표영어 인플루언서를 공격하는 것일 것이다.
어그로를 세게 끌수록
팔로워 한방에 긁어모으기 좋지.
재미 보려고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까나보네.
반쯤 풀린 눈으로 라이언마마를 저격한 피드를 다시 눌러보았다.
어머 지금까지 저 책에 나온 잘못된 표현 그대로 아이한테 말해주고 있었는데 어떡해요.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네요.
이 정도면 책 다 회수하고 피해 보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말 너무 화가 나네요.
이미 잘못된 표현 익혀버린 아이들인데 대체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건지.
이런 분위기에서 이야기하기 정말 조심스러운데 호주엄마 너무 무서워요. 처음도 아니고 항상 다른 인플루언서들에게 화가 나 있으신 것 같아요.
이 책 쓰신 분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았었는데… 할말하않입니다.
댓글 286개.
심상치 않아 보였다.
라이언마마 계정에 들어가 보았다.
게시글이 다 내려져 있었다.
어머, 마음고생하고 있나 보네.
안쓰러운 생각과 달리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 본인 실력에 비해
너무 과대포장했다 싶긴 했지.
오늘 밤은 왠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폰을 내려 놓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