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그런 장면이 꽤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깊게 내 뇌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그것은 우리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 결국 다 듣고 나면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 같은 시간 동안 늙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 원고는 우리의 늙음에 대해 바치는 글이다.
첫 번쨰 환자. 그녀는 50대 중반의 지적인 이미지의 주부인 M씨다. 한참을 질건조증으로 고생해 온 분이었다. 폐경이 되면 여성에게서는 난소에서 분비되는 에스트로겐이 급격하게 감소하는데 그로 인해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있는 부위에는 여러 가지 고장이 난다. 문제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 에스트로겐 수용체는 우리 몸의 전체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비뇨생식기계에도 분포해 있는데 그러다 보니깐 위축이 심해져서 소변 볼 때도 아프고, 남편과 섹스를 할 때도 아프고, 너무 위축이 심해서 피까지 종종 난다고 한다. 우리는 한참을 대화를 했다. 애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르몬 치료에 대한 공포심이 심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다양한 민간 요법을 시도해 보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부작용이 뒤늦게 발견되어 후회하는 분들을 종종 진료실에서 만나뵙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10년가량 섹스리스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해져서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단, 갱년기가 되니 몸이 따라주지 않게 되는 것이라 이를 직접 겪어보지 못하는 남편이 얼마나 이해를 해줄지도 모르겠고. 만성적인 우울감이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M은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그 와중에 섹스가 부부 사이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는 똑똑한 여성이었다.
M은 용기 내어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외음부의 호르몬 크림도 열심히 발라보기로 마음 먹었고 내 가이드에 따라서 치료를 따라오겠다고 다짐했다. 유방암의 위험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어짜피 여성들은 나이가 듦에 따라 유방암의 발생 위험은 증가한다. 가족력이 없는 한 호르몬 치료의 유방암 리스크는 호르몬 치료를 받지 않는 여성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통계를 믿어보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통계는 통계일 뿐이지만, 그래도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방치할 순 없었다.
호르몬 치료의 효과는 드라마틱했다. 다시 진료실을 찾아온 M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물음에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요즘 남편과의 섹스가 매우 즐겁다고 한다. 호르몬 처방전을 받아갈 때까지 M은 밝고 활력이 넘쳤다. 그녀는 진료실에서 용기내듯 말했다.
“저희 남편이 산부인과 간다고 하면 무척 좋아해요. 선생님, 저 몇 일 전에는 하루에 두 번도 했어요. 남편이 너무 좋아하고… 요즘 덩달아 가정도 화목해진 것 같아요. “
두 번째 환자. P씨는 미국에서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 진료를 보기 위해 내 클리닉에 왔다. 거의 10년간의 거대 자궁근종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이었다. 배에 손을 대면 딱딱한 덩이가 만져질 정도로 자궁이 커져 있는 상태였고, 주기적인 월경통과 하혈로 삶의 질은 바닥까지 떨어져갔다. 수술이 필요한 케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저기 비수술적 방법으로만 권유 받아서 비싸고 소용 없는 시술로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의사에 대한 신뢰마저 사라지고 있는 상태였다.
골반 초음파를 확인해보니, 화면을 가득 채운 다발성 거대 근종이 확인되었고, 즉시 나는 수술을 권유했다. 수술만이 해결 방법이었다. 이미 골반을 가득 채운 거대 근종은 방광에 소변이 채워질 공간도 내어주질 않았다. 그 덕택에 아직 폐경이 되지 않은 40대 후반인데도 벌써 요실금 증상이 생겼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근치적인 방법은 오로지 수술임을 알려드렸다. P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큰 결심을 하고 내 결정에 따르기로 했으며 다발성 거대 근종 진단 하에 현재는 자궁 전체를 다 들어내는 전자궁절제술을 시행하였고 불편했던 부분은 다 개선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비록 자궁은 없는 빈궁마마가 되었지만, 그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모두 해결된 셈이다.
10년 넘게 진료실과 수술방을 넘나들며 나의 환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지냈다. 산부인과라는 전공의 특성 상, 섹스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했으며 여러 전문 서적들을 탐독했다. 사실 이 두 환자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나의 소중한 환자들이 있다.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우리는 모두 성적 고민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을 연구하는 과정이 성에 관한 연구인 ‘성 과학(Sexology)’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성 과학은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진화 생물학, 의학을 아우르는 복합 과학이다. 우리의 생활과 노화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성 과학을 공부한 이유도 나와 함께 나이 드는 환자와의 유대감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근본적인 고민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어쩌면 외롭고 잔혹한 현실에서 작은 희망을 주고자 이 글들을 시작했다.
실제 우리 환자들의 증언, 폭넓은 과학 및 임상 사례, 우리 자신의 연구 내용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여성의 성애를 풍요로운 태피스트리로 제시하고자 했다. 여기서 성적 만남은 즐거움이고, 회환이고, 감정적인 유대이며, 초월적인 사랑이다. 나이 들음에 따른 성 활동과 관련된 의사 결정을 하는 데서 나의 글들이 눈 밝은 안내자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관계 안에서, 또 관계 밖에서 언제, 어떻게 그리고 당연히 왜 우리는 섹스를 하는지와 관련해서 말이다. 하나의 ‘지침서’로 기획을 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활용할 수 있고, 섹스 파트너와 공유할 수 있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자부한다. 우리는 이러한 토론의 장이 모두에게 여성의 성 심리가 보이는 다양한 면모와 미묘한 차이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해 주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