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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화 Jul 07. 2023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미치는 영향...

섹스가 다는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


정말로 나의 환자들은 저마다의 고통스러운 이유로 외래를 찾아온다. 삶은 다양한 변주곡처럼 어우러지며 연주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만 그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할 뿐.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요즘, 아침의 첫 진료실 문을 두드린 내 나이 또래인 A는 수수하고 깔끔한 소녀같은 인상이었다. 외래 초진 차트에 '성관계 : 무'에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좀 더 편안하게 진찰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차에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그녀의 결혼 상태였다. 


'결혼 = 유'


결혼은 했는데 성관계는 한번도 한적이 없는 경우?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나 아예 없지는 않다. 워낙에 다양한 커플을 보다보니, 아주 가끔 이러한 경우를 보긴 하는데 매우 특수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진료실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여성들이 흔하게 겪는 질염 때문이었다. 사실 질염은 성병이 아닌 질내 상재균의 과증식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성생활 뿐만 아니라 전신 컨디션이나 기저 질환도 흔하게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정말 '여성의 감기'라는 말은 실로 적절한 표현이다. 단, A의 경우는 진찰을 할 때 성경험이 없기 때문에 기구를 질강 내로 넣는 것은 불가능했다. 외음부에 뭍어있는 분비물만 채취했다. 


40대가 되도록 단 한번도 초음파를 본 적이 없는 그녀를 설득해서 골반 초음파도 확인했는데, 성경험이 없는 경우에는 질의 바로 뒤에 위치한 항문과 직장을 통해서 초음파 기구를 넣어 질식 초음파와 거의 동일한 퀄리티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A에게 설명하고 A도 용기를 내어 인생 첫 골반 초음파를 보게 되었는데, 자질 구레한 여러 문제가 있어서 체크를 하길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었고 주기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기로 했다. 


처음 진료실을 찾아왔을 때 위축된 어린아이 같았던 그녀는 조금 이완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A는 어린시절, 납치를 당할 뻔했고 그 당시 범인이 그녀의 몸을 만지는 일이 있어서 그 이후로 의료인 포함 타인이 자신의 몸을 터치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고 덤덤히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자신을 너무도 사랑해서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되니 결혼을 하자고 프로포즈하여 지금까지 섹스가 없는 상태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미안하죠. 남편에게. 정신과 상담도 받아볼까 고민했었는데, 남편이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주더라구요." 


물론 섹스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의 파트너와의 유대감을 유지하고 서로의 존중감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써의 섹스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그녀가 오늘 산부인과 진찰을 처음 제대로 받은 것도 큰 진보(무려 항문 초음파를 시행했다고!)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조금씩 노력한다면 분명 정상적인 성생활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A님이 정신의학과 선생님을 만나 상담 치료를 제대로 받아 보면 좋겠어요. 아직 40대면 너무 젊어요. 남편도 너무 큰 희생을 하고 있고요.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이렇게 멈춰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남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A님 자신을 위해서 그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정신과적 상담치료를 꾸준히 받으시는게 좋으실 것 같아요. 제 말씀 한번 고려해 주세요." 


행복은 수많은 복합적인 조건들의 교집합 안에서 성립한다. 요컨데, 수많은 'and' 논리 연산자들로 이어져 있는 조건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구성하는 수많은 조건들 중 하나만 충족되지 않아도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가 조금씩 반대로, 하나씩 교정되어 간다면 그 불행이 어느 새 행복으로 바뀌는 마법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시작점을 A는 밟은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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