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환상의 도시, 뉴욕으로 향하다.
거의 5년을 몸담은 회사를 퇴사하기로 결정하면서, 그토록 원하던 재충전의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기로 결심했다. 요즘 유행하는 제주 한 달 살이를 할까? 본가에 내려가서 지낼까? 고민 고민하다 새로운 옵션을 발견했다. 바로 미국 여행.
제주도의 미친 물가와 호텔 가격으로 계산기를 때려보니, 이 정도 예산이면 해외도 다녀올 수 있겠다 싶었던 나는 본격적으로 호텔 물색에 돌입했다. 비행기 티켓은 그간 착실히 모아 온 마일리지로 해결하고, 생에 처음으로 BRG 클레임에도 도전했다. 마침 마지막 근무일이었던 2021년 11월 중순은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가 잠시 면제되어 나이스 타이밍! 그렇게 여행 준비를 모두 마치고, 퇴사 이틀 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2년 만에 온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은 고요 그 자체. 나 같은 관광객보다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훨씬 많았고 필요한 서류도 뭐가 그렇게 많은지, 헷갈릴까봐 파일링까지 해갔다. 다행히 탑승객이 많지 않아서 체크인과 입국 수속은 빠르게 진행됐다.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을 먹긴 하겠지만, 공항 라운지를 놓치면 아쉬울 테니 면세품을 바리바리 들고 마티나 라운지로 향한다.
오전 8시, 현대카드로 입장한 마티나 라운지도 텅텅. 곧 위드 코로나 시대가 온다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겠지. 이 시국에 음식을 섭취하는 곳에 사람이 붐비지 않아서 약간은 안도하고 맘 편히 아침을 먹고 영상을 찍을 카메라 배터리를 만땅으로 충전했다.
2년 하고도 2개월 만에 다시 뉴욕을 가다니... 이 시국에 비행기를 타다니! 탑승로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 해외여행을 갔던 그날처럼 두근거림을 안고 출발하는 느낌은 사뭇 새로웠다. 예상한 것처럼 3-3-3 구조의 기내에는 가운데 좌석을 비워두고 띄엄띄엄 승객이 탑승해 있었다. 장시간 비행은 복도석이 국룰인거 너무 잘 알지만 오래간만에 비행기 타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창가석을 사전 예약하고, 다이어터니까 해산물 식사를 미리 주문해두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특별 기내식을 찾아보신다면 저칼로리 식사는 절대 비추 (정말 맛이 없다...) 차라리 해산물식을 추천한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하늘은 시시각각 근사했다. 사실 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50% 정도 힐링 완료된 상태. 그렇게 2번의 기내식과 1번의 간식 시간 끝에 장장 10시간 반의 비행이 지나가고 드디어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뉴욕여행을 온 2019년에는 언니들과 함께 에어 트레인과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미리 예약해둔 60달러짜리 한인 택시를 탔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다가는 안 그래도 아픈 손목이 아작 날 것 같았으니까. 그간의 회사생활이 내게 준 교훈 중 하나는 "건강이 최고"라는 것.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교통수단에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것이다.
호텔을 알아보면서 이번에 가장 신경 썼던 건 아무래도 치안. 그래서 아래 두 가지 조건을 염두에 두고 호텔 서치를 시작했다.
조건 1. 노숙자 쉘터로 사용되지 않아야 했고
조건 2. 그래도 관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브랜드 비즈니스 호텔이어야 했다.
메리어트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최저가 보상제도, BRG (Best Rate Guarantee)를 통해 타사이트에서 발견한 최저가에 25% 추가 할인을 받았다. 최종적으로 Tax포함해도 1박에 150달러의 정말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Courtyard New York Manhattan/Times Square West에 10연박을 예약했다. 한인 택시 기사님도 어떻게 이 가격에 잡았나며 매우 놀라셨다.
사전에 오후 12시 도착으로 기재했더니 방도 미리 준비되어 있어서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이 호텔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어서 솔직히 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고층에 창문이 커서 뷰도 괜찮고 방과 욕실 사이즈도 뉴욕 호텔치고는 꽤 넓었다. 이 가격에, 이 퀄리티에 혼자 머물기가 아까워 보스턴에 있는 친구 H양과 주말을 뉴욕에서 함께 보내기로 했다. 암튼 들뜬 마음을 가다듬고, 짐을 정리한 후 먼저 뉴욕의 상징 타임스퀘어로 나섰다.
그래. 여기가 뉴욕이었지
휘황 찬란한 전광판과 높은 빌딩, 여전히 여기저기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진다.
2년 전에는 열심히 월급을 모아서 뉴욕도 오고 나 정말 성공했구나라고 웃긴 생각을 했었는데, 퇴직금을 탈탈 털어 온 이번 여행은 마치 꿈과 환상의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서 인수인계를 하던 내가, 코시국이 끝나도 해외여행을 가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타임스퀘어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신난 마음에 인스타를 올렸더니 다들 한 마음으로 여행 사진 많이 올려달라고 메시지가 왔다. 힐링을 위해 떠났는데, 메시지를 보니 또 책임감을 느끼면서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이런거 보면 정말 엄마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시즌이긴 했지만 그래도 코로나 시국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어서 1차 충격을 받고, 실내에서도 안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2차 충격을 받았다. 미국은 안전도 셀프다.
원래 11월의 뉴욕은 거의 겨울인데, 다행히 가을이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온 듯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도 가을이고. 늦가을 센트럴 파크를 만끽할 수 있다니. 이건 행운이다.
아름다운 단풍과 드넓은 자연, 여유로운 분위기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센트럴 파크의 묘미는 공원에서 바라보는 시티뷰다.
벤치에 앉아 공원 너머 빌딩 숲을 바라보면 뉴요커들이 왜 그렇게 공원을 사랑하는지 직접 느낄 수 있으니까. 서울에도 작고 큰 공원이 곳곳에 있어서,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할 수 있다면 좀 더 여유있고 참 좋을 텐데.
11월 중순, 미국 동부의 해는 너무도 짧다. 오후 4시 30분이 넘어가니 벌써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뉴욕 야경은 정말 아름답다. 그렇지만 찌들 대로 찌든 직장인의 입장에서 한 편 이런 생각도 든다.
높은 빌딩에 저토록 불이 켜져 있다는건
누군가는 퇴근하지 못하고
밤늦도록 일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씁쓸한 생각이 교차하며 바라본 피프애비뉴는 아직 추수감사절도 되기 전이었지만,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홀리데이 무드를 만끽할 수 있는 이번 여행이 점점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