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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May 21. 2020

사유하는 인간에 대하여

나를 지키기 위한 인문학

인문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정권이 변하거나 세상 체제가 뒤흔들릴 때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일어나는 사람이 바로 인문학도이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수많은 변화 속에서 성장하며 지금까지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인문학을 배운 누군가가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으며, 그것을 실천으로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체제를 수호하는 인문학도'에게만 인문이 필요한 것일까? 


아즈텍 문명인들은 인간이 신의 제물이라는 사회문화적인 인식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같은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고 잡아먹었던 이 식인의 기원을 살펴보자면 영양학적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가 뒤섞여있다. 문명이 정착하면서 인구는 늘어나고, 인간에게 필수적인 단백질 공급원이 되는 동물의 수는 항상 부족하다. 따라서 모든 문명은 필연적으로 야생동물을 가축화시켜야 하는데, 가축화가 잘 되는 동물종의 조건은 1. 성질이 온순할 것 2. 성장이 빠르며 한 세대가 짧을 것 3. 수직적인 집단생활을 할 것 4. 초식동물일 것이다. 


건너편의 잉카 제국은 라마, 기니아피그 같은 대형 가축들을 기르며 식용할 단백질이 있어 식인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아즈텍 제국에서 가축화 할 수 있는 것은 토끼와 개, 칠면조 같은 작은 동물들밖에 없었다. 점점 많아지는 인구 대비 공급할 수 있는 단백질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즈텍의 지배계급은 인간이 신의 제물이라는 사회문화적 정당성을 마련했고, 이런 종교적인 정당성은 대중들에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의 여지없이 얌전히 받아들여졌다.


아즈텍 제국의 식인 풍습을 잔혹하고 미개하다고 여기는 유럽인들은 항상 있어왔다. 그들은 자신의 식민지 지배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타 문명에 대한 이해보다 그들의 잔혹한 풍습을 비하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유럽인들 또한 비난을 피해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는 군중을 대상으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는 오늘날 불공정한 급료로 살아가는 경제적 약자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적이며, 책임과 성과 대신에 부와 자산을 가졌다는 이유로 꼴사나운 옹호를 받는 부유한 자들의 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조건의 시스템을 끝장내고야 말 것이다.' 


연설의 당사자가 히틀러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반발할 여지가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연설은 독일 국민들이 가진 경제적 공포를 '유태인의 책임'으로 돌려 정치적 승리를 거두려는 히틀러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자크 라캉은 역설적이지만 깊이 있는 진실을 주장한 적이 있다. 설령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다닌다는 질투심 가득한 남편의 주장이 사실일지라도, 그 남자의 질투심은 여전히 병적이라는 것이다. 그 남편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질투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같은 비유로 유대인들이 독일인을 착취하며 독일의 소녀들을 현혹시킨다는 유대인에 관한 나치의 주장이 '설령' 전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반유대주의는 여전히 병적인 현상이다. 나치가 왜 반유대주의를 필요로 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나치가 보기에는 그들의 사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조화로운 공동체였다. 그래서 내부 분열과 적대감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자가 필요했다.


이제 좀 더 우리에게 가까운 과거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에 남편을 잃은 과부는 자결하여 열녀가 되는 것이 그 시대에는 도덕의 최고 경지이자 숭고한 자기완성으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이것은 당사자의 뜻이기 이전에 사회문화적 인식이었으며 권유에 가까운 강요였다. 열녀를 배출한 마을은 국가 공인의 열녀증을 받아 나라로부터 식량을 하사 받았으므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는 이 가련한 희생양에게 자결은 자기완성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부추기는 사회적 타살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역사로 비추어볼 때, 우리가 한때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스스럼없이 따르는 사회문화적인 어떤 인식이나 종교적인 교리, 도덕, 논리는 절대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노동자들은 하루에 8시간씩 근무하며 진 빠진다며 불평을 해대면서도 왜 현대 노동자들이 하루에 8시간씩 근무하게 되었는지는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혼이 인간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제도화' 되었으며 가부장제를 수호하고 여성을 노예로 격하시키는 제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신부들은 면사포, 반지, 웨딩드레스 등을 꿈꾸면서도 각 오브젝트가 의미하는 것이 여성의 구속 그 자체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 결혼과 육아라는 것을 여성들이 '선택'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불쾌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사유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며 여성을 사유함으로부터 배제시켜왔던 세계에서 우리는 현재도 차별받고 소외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의 메인사진으로 걸어놓은 그림,  <아테네 학당> 안에는 여성이 한 명 있다. 그림 속 모든 사람들이 서로 논쟁을 하거나 생각하며 바쁜 한편 우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이 여성은 최초의 여성 수학자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히파티아 (370?~414)

수학과 철학에 뛰어났던 히파티아는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손꼽히는 학자로 존경받았다. 그가 무세이온에서 수학 강의를 하는 날이면 온 귀족의 마차가 무세이온을 향했고, 사람들은 그를 마주 할 때마다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 그는 디오판토스의 수로 <Arithmetica>, 아폴로니우스의 <기하 Conics>,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문 학설에 대한 부친의 해설서를 편집하기도 하며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412년, 카릴로스라는 인물이 주교로 임명되며 히파티아의 시절은 끝이 나버렸다. 키릴로스는 모든 철학은 기독교의 정통성에 방해가 되는 것이고 생각했으며, 이런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人性)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공격했고, 지식인들은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이는 헬레니즘 문화의 학문적 전통을 무너트리고 우리가 암흑기라고 부르는 중세 기독교 중심의 세계로 진입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는데, 이 암흑세계의 도래를 앞당긴 것은 히파티아 사건이었다. 사상의 자유를 설파하고 과학과 학습을 형상화했던 히파티아, 게다가 학문하는 '여성'이었던 그녀를 참지 못했던 키릴로스는 그녀를 해할 계획을 세웠다.


415년,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히파티아를 카를로스의 무리가 납치했다. 그들은 히파티아를 무참하게 폭행한 후 머리카락을 마차에 묶어 카라레움이라는 교회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옷이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를 굴 껍데기로 갈기갈기 긁어 찢어버렸고, 너덜너덜한 살갗으로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불속으로 던져버린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 벌어진 최초의 마녀사냥이었던 셈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났고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도시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로마 지성의 종말이었다. 히파티아의 죽음을 둘러싼 모습은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세상을 퇴보시키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아테네 학당>을 그린 라페엘로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까지도 여자의 사회활동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라파엘로의 밑그림에는 히파티아가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운데에 히파티아를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주교가 강력히 반대하고 이 여인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기어코 그녀를 가장자리 부분에 그려 넣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거기서 조용히, 그리고 신비롭게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게 되었다. 


히파티아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남성의 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 수많은 천재 과학자와 수학자와 선구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 다시 깨닫는다. 사유하는 여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역사 속에서 가루도 남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거라는 남성 사회의 협박 속에서 몇천 년의 세월을 보냈을까, 우리는 비로소 지금에서야 여성도 마음껏 읽고 사유할 수 있는 시대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가 도래한 지금, 우리는 사유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난민,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 노인, 어린이를 쉽게 혐오하고 쉽게 사회에서 배제시킨다. 사유하지 않고 쉽게 편승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미디어나 매체조차 상실해버린 시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발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정보의 호수 속에서 갈 곳을 모른 채 끝없는 혐오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고차원적 사유 없이 살아가며 기술만을 취급하고 돈만 벌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에 인간으로서 고유한 자질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문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끝없이 질문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부터 인간답게 사는 게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인간은 계속해서 질문해야 한다. 질문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에 순응할 때 인간은 머지않은 미래에 기계보다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인문을 접하는 데에는 순서가 있다고 한다. 어려운 인문고전은 타 철학자나 문학작품을 빈번하게 인용하는데, 인문 기본서를 읽어 기초 소양을 갖추지 않았다면 이런 인용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현대 자유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아버지 제임스 밀에게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제임스 밀은 아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학문과 관련된 책을 이것저것 주며 여러 번 읽게 만들고 그 안에 담긴 저자의 뜻을 완전히 파악하게 했으며, 그에 대한 의견 그리고 이해도를 정확히 측정할만한 질문을 던지는 질의응답식으로 교육하였다. 아들이 10세가 되자 그들은 서로 여러 가지 논점에 대하여 말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제임스 밀의 교육은 토론식이나 문답식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둘 사이의 잦은 담론을 통해 아들에게 지식을 이해시키고 이를 제대로 이해하여 다시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도록 했다. 제임스 밀은 되도록이면 자신이 아들을 가르치기 전에 아들이 스스로 그러한 개념들을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홀로 생각하게 두었고, 아들이 다방면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전까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인문 고전 독서 교육이다. 이 교육은 고대로부터 서양 상류층 및 지식인 계층이 자신의 자녀를 엘리트로 성장시키기 위해 사용해 온 독서법이다. 인문 고전은 짧게는 50년, 길게는 2천 년 이상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읽힌 만큼 위대한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역사적인 사상가들의 질문을 함께 사유하고, 그 질문들이 사회 안에서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 맥락을 파악하게 하는 독서법인 것이다.


미국 시카고 대학은 이 <존 스튜어트 밀> 식의 독서법을 도입해 인류의 지적 유산인 고전 철학서와 인문서 100권 이상을 필수 교양으로 정하고 학생들에게 읽게 했다. 이 교육을 따른다면 타인이나 사회의 생각이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기 전 다시 되묻고 비판하며 자기만의 사유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끝없이 많은 정보와 많은 의견이 휘몰아치는 현대에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과도 같은 능력이다.


따라서 미국 시카고 대학이 도입하고 정리한 <시카고 플랜>의 인문 고전들을 차례대로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필사하여 나의 생각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생각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플랜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목적이며, 인문고전을 읽기 어렵거나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우리의 생활과 가까워 생각해 볼 만한, 또 흥미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주제를 발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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