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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면 기뻐라, 지고 나면 슬퍼라

이시아의 글밭에 오면 마음이 가벼워지리라




종로에서



십 년 만에 종로에 발을 들여놓고서

청계천을 두리번거린다

내 생애 처음으로 문학을 꽃피우던 시절은

복사꽃처럼 환했다

먹자골목 안 파전집은 아직도 그대로 있을까

막걸리집은 그대로 있었을까

잡탕집 허름한 나무 간판에 의지하여 비좁은 골목 안을

헤매일 때는 참 행복했다

종로 길바닥에도 남들이 버린 시어들이 즐비했고

골목 안에도 잃어버린 천 원 짜리 지폐처럼

운수 좋은 날은 비틀거리다가도 작은 물고기들을

건져올릴 수 있었다

분수대 옆에서 모인 어른이 되어버린 시인과 작가들은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두리번거린다

세상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청계천 물길도 변해버린 

뒤였다

허공을 걷던 구름이 내려와 길이 되어주었다

우리들이 나누는 언어는 구석기 시대의 토기가 

되었다

시인의 웃음만이 아직은 귀에 익었지만

지나가던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모처럼만의 외출에서 구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머니 속에 든 구름 속에는 못다란 말들이 옷고름을 풀어헤치며

그립다고 말했다.









생각의 깊이




하루가 강물이라면 얼마나 오래 흘렀을까

만약 하늘이라면 또 얼마나 깊었을까

터널을 빠져나가지 못한 기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철교 위를 달리는 꿈을 꾼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먼지처럼 뽀얗게 쌓이고

어디서부터 부유하는 것인지 햇빛에 난반사되는 생각들의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황망해지는 오후

침몰하는 초침과 분침은 잘디잔 먼지들을

내 생에 쏟아놓는다

무디어지는 발걸음이 지글거리는 태양 아래로 걸어가고

숲과 그늘 사이에서 잠시 행랑을 풀어놓고서

그동안 나를 스쳐간 이들의 뒷모습을 떠올려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리움이 있어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톡, 피어오르는 먼지들

그대를 생각하다가 그리웁다는 단어를 떠올리고

보.고.싶.다 라는 말이 생각나고

사랑했을까 라는 말이 떠올랐다

숨 쉬는 동안에도 무수한 말들이 떠올랐지만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언어들

촘촘한 그물 속에 갇혀 있다가 먼지로 피어오르는

언어의 유희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 슬픔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들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모두

생각의 틈 속에 끼어 있던 먼지들이었다

다시 생각들이 깨어나 부유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4월 28일. 목







 떠돌이 별에 대하여





혹자들은 말한다

외로움은 병이라고

그립지 않은 척하면서 살아온 탓에

쓸쓸한 골목만 키워온 이들이 오늘도 방문을 걸어잠그고

낯선 별들과 교신을 한다

무척 그리웠노라고

보고 싶어 미치겠노라고

오늘의 일기장에는 날씨 흐림 혹은 비라고 적어놓고서

젖어서 더욱 처량해 보이는 가로등과 구부러진 채로 외로운 골목길과 

입 벌린 우체통이 혀를 빼문 채 젖어드는 고지서들

바람의 색깔은 갈색이거나 황색으로 그려넣으며

낡은 구두 뒷축의 삐뚤어진 경사각을 하나 그려놓는 것이

오늘의 일기 전문이라고 주장했다

외로우니까 외로운 거다

주문처럼 외우며 창문 커튼을 내리며

마지막 교신은 

안녕, 별이라는 글자가 끝이 되었다

아침이면 우리는 네모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등 굽은 자세로 일터로 향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빈 손을 내밀기도 하지만

타인의 온기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

언제쯤이면 지상의 따뜻한 곳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

머나먼 꿈 같기도 한,

현 시대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별빛 같은 꿈들이 밤하늘에 흩어지고 있다

더러는 꿈을 접고 쓸쓸히 추락하고 마는가.









봄이 오려면 아직은




꽃이 피다가 진다

지는 꽃에도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는 법

꽃샘바람에 볼이 얼얼해진다

옷 안으로 스며든 바람 한 바퀴 돌아 바짓가랑이로 빠져나가고

주머니엔 아직도 먼지들만 쌓인 채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것은

죄악일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는 것은

수도고행승처럼 답답한 현실이 된다

그대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문자를 보낸 뒤로 오지도 않을 문자를 뒤져보며

또 하루를 보내고 나면 서녁 하늘엔

노을빛이 빨갛다가 잿빛으로 바뀌어간다

지고 싶은 꽃이 어디 있으랴

피고 싶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바람에게 혹사 당하는 꽃들에게 내 낡은 옷을 벗어주었다

그제서야 피는 꽃에게

이름보다 먼저 내 쓸쓸함을 보여주었네

눈물을 흘리며 피는 꽃이 진정한 내 친구가

되었네.Y�;��7,�R4��








강 가에서 보는 낮달




그대의 소식을 먼 발치로나마 듣고 난 뒤에 

강 가로 나갔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억새풀 숲에 웅크린 새들에게 수없이 중얼거리며

안개에 젖은 바람 속을 더듬으며 나아갑니다

그제서야 꽃잎의 새 싹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꽁꽁 얼었던 겨울 동안 저수지에서는 매일밤 쩡쩡거리는

소리를 내었으며

사람들은 옷깃을 여민 채로 인사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결국엔 땅 속 지라도를 바쁘게 내려가는 사람들의 등이 굽어 보였습니다

낯익은 골목에 들어서면 옥탑방에서 내건 빨래들이 왜 그리도

후줄근하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빨래에서 물이 빠져나가 하늘을 물 들이는 동안

괜히 슬퍼 졌습니다

밤새도록 강물은 뒤척이다가 길을 떠나는 길손처럼

강안에 드러난 실뿌리를 붙잡으며

통곡을 합니다

사랑아, 어디 있느냐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저러다가 제 풀에 지치면 서해바다로 스며 들겠지요

지지 못하는 낮달이 조바심을 치고 있을 때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니, 라고

물어봅니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내 그리움들아,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의 이유 같은 것들

주머니를 털어보면 분명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기억 속의 실뿌리들에게

너의 존재를 묻는다

길을 걷다가도 가로수 잎들에게도 물었고

스치는 바람에게도 안부를 물었으며

촛불 켜는 밤에도 목 놓아 운 적이 있었다

그립다고 해서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냥 그리운 것이었다

너를 보면 별이 생각나고 지지 못한 낮달이 생각나고

내 낡은 구두 뒷축이 생각나고 어젯밤 꿈에 나타난 그대를 생각하고

오늘 밤에는 뒤척이는 강물에게서도 네 그리움이 생각났다

반항할 수 없는 그리움이라면

이젠 만나야 한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또 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기차를 타고




철교를 건너는 동안에도

캄캄한 바깥 세상은 마을에 켜진 불빛들만 깜박거리고

휙휙 지나는 전봇대들도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날 수 있는 새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정박해 있는 밤바다로 가서 외딴 섬을 바다로 밀어넣으며

내 그리움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도시에서의 삶은 골목마다 누추한 쓰레기들로 만원이었고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가난한 꿈들을 꾸며 달려가는 일상들은

역사에 닿자마자 구겨진 삶을 개찰구에 집어넣으며

항상 목젖에 걸리는 딸칵거리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한다

땅 속에서 기어나온 삶이란 얼마나 누추한가

잿빛 빌딩과 빌딩를 더듬으며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찾아서 배회하는

구두 뒷굽들은 또 얼마나 피곤한가

떠나보낸 그 섬으로 가서

한 사나흘 해풍이 푹 젖고 싶다

산도퉁이를 돌아가며 기적을 울리는 저 기차도 가끔은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바다가 불쑥 나타났을 때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존재의 의미





네가 있었음으로 내가 있었다

시간의 굴레바퀴 속에서 우연히 톱니가 맞물릴 확률은

0.0001 프로였다

똑같은 일상들이 나열되고 골목길은 어제처럼 누추하게 

돌아앉아 마른 세수를 하고 있다

누군가 골목길로 들어와 번지수를 찾고 있었지만

이방인에게는 눈곱 만큼의 은혜도 베풀 줄 모르는 이들은

대문 우체통에 몰래 집어넣은 밀린 고지서를 빼서 옥탑방으로 올라간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들은 이제

파산선고가 내려졌음으로 갚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사랑도 가끔은 파산선고가 내려졌다

슬픔이거나 이별이거나 또 다른 방황이거나 환희일지도 모르지만

떠난 사랑은 절대로 되돌아보지 않는다

네가 없음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다 떨어져 내리고

묵직한 달이 낮달로 변해 갔고

둑이 터져 범람하는 물처럼 갑자기 슬픔이 들이닥쳤다

잠시 동안은 이 지상을 떠나 있어야겠다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비로소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지독한 숨바꼭질.









 비밀




쉿, 비밀이 하나 있어

사랑이 시작됐거든

열꽃이 올라 앰뷸런스에 실려갈 때쯤

면회를 오려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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