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설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더불어 올해 초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 역시 새삼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 상에 대해선 포털에서 찾아보면 다 아는 내용들이니 여기선 시인의 작품집 표제작인 '날개 환상통'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원래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순서상으로는 문예지 당선작이어야 하지만, 세계적인 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의 작품을 공부(?)하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해서입니다.
먼저 김혜순 시인의 작품은 시인의 작품 세계를 모르고 읽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일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경우 매우 현대시적인 경향을 띠는 편인데 그건 바로 김혜순 시인이 한동안 심사를 봤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은 동아일보의 경우 흔한 말로 전통 서정시는 안 뽑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김혜순 시인이 뽑은 당선작은 어떤 시였을까요? 쉽게 말하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시였고, 좀 고상하게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에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다음 사전에서 찾아본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비역사성, 비정치성, 주변적인 것의 부상, 주체 및 경계의 해체, 탈장르화 등의 특성을 갖는 예술상의 경향과 태도
여기서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했으니, 모더니즘의 뜻도 살펴봐야겠군요. 모더니즘은 기존의 도덕, 권위, 전통 등을 부정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는 예술상의 경향과 태도
그러니 김혜순 시인의 시 세계는 기존의 도덕, 권위, 전통 등을 부정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비역사성, 비정치성, 주변적인 것의 부상, 주체 및 경계의 해체, 탈장르화 등의 특성을 갖는 예술상의 경향과 태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혜순 시인은 ‘시 쓴다’ 하지 않고, (몸이) ‘시 한다’(doing)고 표현한다네요. 이는 진리(제도)로서 굳어진 것, 당연시되는 것, 남성적 시작법의 거부라고 합니다. 여성의 몸과 언어를 탐구하며 다른 말하기 방식을 고민해왔다고도 했고요. 그는 시론집 ‘여성, 시하다’(2017)에서 “‘시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해외 평단에서는 김혜순 시인을 두고 '프랑스 페미니즘의 시적 현현'이라고 칭송한다고 합니다. 페미니즘이 뭔가요? 이 역시 다음 사전을 검색하면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성별에 의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을 주장하는 주의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에서 말하는 주변적인 것의 부상은 여성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일 것이고, 주체 및 경계의 해체는 '시 한다'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연하게 굳어진 남성적 시각과 권리의 거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선지 전미도서비평가협회는 그녀의 시집에 대해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대담하게, 전쟁과 독재의 여파,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삶의 고통, 이를 극복하는 의식을 대안적 상상의 세계로 반영한다”면서 전복적 시선이 돋보인다고 했다네요. 이러한 평가는 김혜순 시인이 한국 페미니즘 여성 시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시인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죠.
지루할까봐 이쯤에서 구분선을 하나 넣었습니다.ㅎ 위에 언급한 내용을 보면 그녀의 작품 세계를 정확히는 몰라도 이제 대충 감은 잡았을 겁니다. 매체에 소개된 그녀의 어록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죽음은 몇 인칭일까, 자주 생각해 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육인칭이나 칠인칭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네요. 우리는 이 말만으로도 그녀의 사고가 사차원 너머에 있음을 알 수 있죠.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님이 확실합니다. 그녀는 또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일인칭에서 육인칭이나 칠인칭으로 건너갔던 순간에 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네요.
페미니즘의 시적 현현이라는 칭송에 걸맞게 그녀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육체성과 죽음'에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를 비판하고, 여성의 억압, 남성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따라서 기존의 시 세계에서 탈피하여 실험적인 시를 선호할 수밖에 없으며 가장 단순한 것들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김혜순의 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독자가 새로운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기도 하고요.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날개 환상통'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훨씬 쉽게 느껴질 겁니다. 시의 본문을 보면 '새'가 나오는데 이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시어이자 시적 화자인 여성 자신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집의 첫 페이지에 보면 이 시집의 서시에 해당하는 '새의 시집'이라는 시가 나옵니다. 여기에 옮기려고 했지만, 괜히 내용만 길어지고 복잡하게 보일 것 같아서 한 가지만 말하고자 합니다. 그 시의 1연은 이렇습니다.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새하다'는 표현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건 바로 제가 앞서 설명했죠. 김혜순 시인은 ‘시 쓴다’ 하지 않고, (몸이) ‘시 한다’(doing)고 표현한다고요. 이로 유추해 보면 새한다는 건 시를 쓰는 행위이며 새는 곧 화자 자신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즉, 시를 쓰는 화자랄까요. 그걸 염두에 두고 '날개 환상통'을 읽으면 거기 나오는 '새'의 의미를 보다 더 가깝게 느끼지 않을까 싶네요.
이제 우리는 '날개 환상통'을 읽어볼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김혜순 시인의 시 세계를 모르고 작품을 읽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어렵게만 보이던 시가 이제 얼마만큼 마음에 들어오는지 경험해 보시길요.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어떤가요? 남성 중심의 권력적인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을 상상하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나요? 하이힐은 여성의 전유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여성이기를 강요하는 억압적 도구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하이힐을 신은 새(여성)가 날지 못하고 딱딱한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걸어갑니다. 상상만으로도 힘들고 아파오지 않나요? 마스카라가 녹아 흐른다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이지 싶습니다. 밤의 깃털이 무한대라는 것은 억압을 깃털처럼 가볍게 취급하는 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들은 말했다/ 애도의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여기서 애도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행위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갓집에서 상주의 자격을 떠올리면 쉽겠네요.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남성 중심의 권력일 테고요. 애도는 우리 것이니 너(여성)는 더러워서 안 된다고 하죠.
그럼에도 새(여성)는 꿈을 꿉니다. 팔을 펼치면 날 수 있는 꿈이겠죠. 말 끊지 말라고 최소한의 저항을 하면서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날개가 있다는 것)가 있으니까요.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선글라스는 권력자를 상징하고 콩 두 개는 선글라스 뒤에 감춰진 눈동자를 말하는 것 같네요. 괄호 속 말은 여성의 항변쯤으로 이해됩니다. 그 눈으로 우리(새, 여성)의 꿈이 뭔지 보이냐고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여성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건 나도 먹고살기에 바쁘니 당신의 사정이나 하소연을 들어줄 수 없다는 뜻 같네요.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는 말을 그려보면 얼추 이해되기도 합니다. 걸어가면서 먹고, 머리를 올려야 하고 걸어가면서 피를 싼다(월경)고 하죠.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생리통(고통)을 겪는 여성의 위치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졌으므로 모래의 날개를 가졌냐고 자조합니다.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날 수 없는 좁은 어깨로 살아가는 여성은 그렇게 살다가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리는 환상통이 나옵니다. 날지 못하는 통증이기에 부끄러워 걷습니다. 혹은 이를 여성의 월경으로 상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의 나팔관이 겨드랑이를 벌린 모습 같기도 한 점을 생각해 보면요. 5연에서 피를 싼다고도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이 말은 세 든 집이 난소를 말함이고 여성의 몸이 태생적으로 고통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운명론을 받아들이는 모습이겠네요.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이 표현은 앞서 1연의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와 같은 의미로 고통의 순간이 무한대로 이어진다는 의미지 싶습니다.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스스로 삶을 놓을 수조차 없이 권력자에게서 감시받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쯤으로 해석해 봅니다.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둥지에 안착하지 못한 새의 끝없는 방황을 나타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니라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하이힐이라는 억압의 상황에서도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소립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나는(새) 이제 날 수 없어(권력으로부터 해방) 숨을 곳이 화장실밖에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서 애도의 행위를 합니다. 3연에서 말했듯이 애도의 자격은 권력자들에게만 허용된 것임에도 몰래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규율의 전복을 꾀합니다. 이는 앞서 전미도서비평가협회가 그녀의 시집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복적 시선이 돋보인다고 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녀가 왜 페미니즘 여성 시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시인인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전복의 행위를 꾀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여성성을 강요하면서 나를 떠밉니다. 그러므로 내가 쓰는 이 시 역시 어디에도 내려놓을 곳이 없겠습니다.
'날개 환상통'에 등장하는 새(시적 화자인 나, 여성)는 애도의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채 '환상통'을 겪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가부장제 사회의 독재와 억압 속에서 날개가 꺾인 채 살아가는 여성의 복잡미묘한 심리를 노래한 작품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