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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만 Oct 25. 2024

쉬어가기) 시적 산문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더니 밤바람이 제법 쌀쌀합니다. 나간 김에 바로 옆이 후문이라 그쪽으로 나가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을 보며 한참 섰다 왔네요. 차들이 질주하며 내는 소리를 듣는데 조금 외롭더군요. 한데, 나이가 드니 이제 외롭다는 말도 왠지 지지리 궁상 같아서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만 외로운 게 아니라 어른도 외로울 수 있는데 말이죠.


  문득 사전에서는 외로움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 궁금했습니다. 한 번도 찾아본 기억이 없거든요. 네이버 사전에서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다음 사전에서는 ‘혼자가 되어 적적하고 쓸쓸한 느낌’이라고 하네요. 사실 베란다에서도 차들이 지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밤이면 차들의 굉음 사이로 귀뚜라미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죠. 굉음이 외로움이라면 귀뚜라미 소리는 그리움쯤, 그래서 베란다만 오면 생각에 잠기나 봅니다.


  책상에 앉아 한글 문서창을 엽니다. 텅 빈 창을 가만히 바라보죠. 모니터 속 화면이지만 저는 가끔 이게 원고지나 종이쯤으로 보입니다. 기형도 시인은 「빈집」에서 이를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라 했고, 망설임을 대신하는 눈물이라 했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이라 했다지요. 사랑을 잃고 썼다고 하니 왜 아니 그럴까요. 저는 이제 공포와 눈물과 내 것이 아닌 그 열망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가 됐습니다.


  제목은 ‘쉬어가기’라 써놓고 구구절절 가을을 타고 있습니다.ㅎ 저는 이렇게 가을을 나는데 당신의 가을은 어떤가요? 당신도 저처럼 외롭지는 않은지, 이렇게 글로나마 묻습니다. 시간이 금이라는 말도 있고,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도 있죠. 근데요. 요즘은 그것만으로는 자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한 번은 폴더를 정리하는데 제가 메모장에 이렇게 적어뒀더군요. ‘추일서정, 옛날 시지만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음’이라고. 이런 거 보면 저라는 사람도 참 웃기죠. 이게 뭐라고 메모장에 따로 적어놓기까지 했을까요. 그래서 또 찾아 읽어봅니다.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 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린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아... 메모장 기록이 맞았습니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군요. 김광균 시인하면 떠오르는 게 ‘와사등’, ‘설야’, 그리고 소개한 ‘추일서정’입니다. 문득 시인의 약력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설야’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더군요. 고딩 시절 교과서로 배울 때는 그런 건 생각지도 않았는데 한동안 신춘문예를 준비했던 저로서는 참 반가운 마음입니다. 시인이 1914년생이니 스물넷에 설야를 썼겠군요. 설야는 이후 1939년 남만서점(南蠻書店)에서 간행한 첫 시집 『와사등』에 수록되었고, 소개한 추일서정은 1940년 7월 『인문평론』에 발표했는데 두 번째 시집 『기항지』에 수록되었다고 하네요. 내친김에 ‘설야’도 한번 봅시다.


설야(雪夜)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곧 다가올 겨울을 예감해서인지 이 시도 참 좋습니다. 예부터 ‘설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시구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청각화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눈 내리는 고요한 풍경을 이토록 감각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합니다. 김영랑의 시가 눈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라면, 김광균의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하더니 과연 그렇습니다. 김광균 시인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인 김기림으로부터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조(才操)를 가진 시인”이라는 찬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1930년대 말에 모더니스트 시인의 선두에 선 셈입니다.


  다시 추일서정으로 돌아가 보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낙엽도 그렇고 하필이면 나라 이름도 바람에 날려 가볍게 나풀거리는 ‘폴랑’을 연상시키는 폴란드라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망명정부의 지폐라니요. 시적으로 이만한 조합도 흔치 않을 것 같네요. 덕분에 후대 시인들은 누구도 낙엽과 망명정부의 지폐를 엮어서 쓸 수 없게 됐지만요. 오늘날 폴란드인이 이 시를 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지도 궁금합니다. ‘추일서정’이 쓰인 바로 한 해 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역사적 사실을 그려냈을 테니까요.


  프랑스에 세워진 폴란드 망명정부가 발행한 지폐는 낙엽처럼 덧없었을 텐데요. 시인에겐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민족말살통치 시기인 경성의 가을하늘도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하늘만큼이나 외로웠을 겁니다. 시에서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라고 했듯이 저 역시 밤 산책을 나갈 때면 돌 하나를 집어 멀찍이 던져보곤 합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굉음을 들으면서요.


  시에서는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고 했지만, 현실에서 돌 던지기는 바로 앞에서 툭- 하고 떨어지고 말더군요. 그럼에도 마음에선 기울어진 풍경이 보이고, 고독한 반원을 긋습니다. 그때 저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느낍니다. 당신의 가을은 어떻게 오고 있나요? 작년의 가을과 올해의 가을은 또 어떻게 다른가요? 앞으로 우리는 몇 번의 가을을 건강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면 꽃과 나무가 눈에 든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지요. 어쩌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신이 주신 특별한 재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텅 빈 한글 창을 바라봅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때문일까요. ㄱㄴㄷㄹㅁㅂㅅ... ㅏㅑㅓㅕㅗㅛ... 자음과 모음의 조합, 그 힘이 이렇듯 대단한 거였구나 싶어 새삼 전율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글자를 써나간다는 게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글자, 한 글자가 모여 문장이 되는 거구나, 그런 의외의 깨달음 같은 거겠죠. 이제 시든 소설이든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꿈을 크게 잡을 것도 같습니다.ㅎ 번역을 염두에 두고 쓰는 사람도 있을 테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해외 출판사를 찾을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그런 인식은 노벨문학상을 염두에 둔다기보다 생각의 크기가 그만큼 커졌다는데 의의가 있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네 시와 소설은 어떤 방향으로 변모해 갈까요.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일단 한국적인 정서인 ‘정(情)’이나 ‘한(恨)’이 극단적으로 증가하거나,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번역도 그렇거니와 외국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줄어들 여지가 있겠고, 또 한편으론 한강 작가의 선정 이유에서도 드러났듯이 ‘시적 산문’이 정과 한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성질이니 증가할 것도 같고요. ‘시적 산문’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우선 인공지능인 챗GPT에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변하더군요.

              

 

  당신이 보기엔 어떤가요? 적절한가요? 저는 그렇다고 말하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제가 ‘추일서정’과 ‘설야’를 들고 나온 것도, 저의 밤 산책 일화를 전한 것도 당신의 서정을 생생하게 끌어오기 위해서인지도 모르죠. 아무리 시대가 변했기로 개화기의 창가와 신소설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면, 외로움을 당신에게 전하기에 ‘시적’인 정서만큼 강렬하고 생생한 것도 없을 테니까요.


  지금에 와 돌아보면 우리 문학은 서양사 200년간에 걸친 문학사조를 불과 2~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덕분에 일제강점기라는 그 참담한 시기에도 문학만은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고요. 그러니 2010년대 미래파로 불리는 시단의 등장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 미래파조차도 몇 년 새에 저물었는데 그 이름도 발칙한 후장(後腸) 사실주의라는 게 잠시 등장하는가 싶더니 그조차 이내 사그라들었죠. 소설 역시 계몽주의를 거쳐 SF 웹소설에 이르기까지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달려오더니 마침내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정점에 올랐고요.


  수많은 사조가 있다지만 근대를 리얼리즘으로, 현대는 모더니즘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리얼리즘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자연주의로 묶인다면 모더니즘 역시 유미주의, 상징주의, 주지주의, 초현실주의나 실존주의, 앞서 언급한 미래파 등으로 묶을 수 있겠지요. 그 이후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볼 수 있겠고요. 새로운 사조는 언제나 기존의 사조를 부정하면서 생겨나는데 이제 더는 인류가 만들어낼 말장난 같은 게 아니고서야 그럴듯한 사조도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류학계에서는 호모사피엔스 이후로 포스트 휴먼으로 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말 그대로 휴먼 다음의 휴먼이니 인간 다음 세대의 인간이라는 뜻이라네요. 그야말로 알파 세대인 인공지능을 말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한국적 정서인 ‘정(情)’이나 ‘한(恨)’을 이해하기 힘든 세대이기도 하죠. 지금 젊은 시단의 풍토만 봐도 가슴을 후벼 파는 운문시가 아니라 수필 같은 담백한 시, 산문시가 주를 이루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일례로 몇 년 전부터 중고등학교 백일장에 가보면 아이들이 시를 쓸 때 죄다 산문시로 쓰더랍니다. 게다가 운율 또한 무시한 채로요.


  제가 신춘문예를 포함해 문예지 당선자들의 당선작을 살피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은 현대시 스타일로 등단한 시인은 향후 작품을 발표할 때도 같은 스타일로만 발표한다는 겁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이들이 운문시는 못 쓰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군요. 앞서 말한 아이들이 커서 지금의 당선자가 된 게 아닐까도 싶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그게 또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눈물 콧물 빼지도 않고, 심금을 울리지도 않는데도 말이죠. 이는 현실의 고단함에서 파생된 상실과 애도로 쓴 시가 아니라, 시대(혹은 개인)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쓴다는 거겠죠.


  이는 판소리에서 창가를 거쳐 트로트, 발라드, 통기타, 록, 지금의 K-POP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거쳐온 음악처럼 시의 고유한 형식도 이젠 변화해 나갈 것 같습니다. 한강의 소설이 ‘시적 산문’으로 불리듯 시 역시 산문적 시라든가, 동화적 시도 가능할 테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특정한 하나의 장르만 고집하기보다 문학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우리네 정서만이 아닌, 세계인의 시선에 맞춘 쓰기도 생각해 봄 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작금의 시를 보면 시단의 풍토도 확실히 변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지금 당신의 글쓰기는 어떤 변화를 꿈꾸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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