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 시를 뽑은 장석주 시인과 김기택 시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당선작의 심사평을 보기 전에 이분들이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향해 어떤 말을 했는지를 살펴보죠. 요약하자면, 산적해 있는 사회적 현안(문제점)을 제치고 기분에 쏠린 작품이 많아서 놀랐다고 합니다. 이는 아마도 개인의 감정을 소품으로 보는 심사자의 성향이 반영된 것도 같네요. 그래서 뽑은 것이 개인의 기분(감정)을 말하지만, 그것이 개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그나마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하는 작품을 고른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말도 했습니다. “범속한 생활 감정을 의미가 분광하는 이미지로 빚어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언어 감각과 섬세한 느낌의 표현은 시의 풍부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되었다. 숙고와 머뭇거림에서 길어낸 사유를 자기의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능력, 능숙한 악기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듯이 시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귀한 재능이다.”라고 하나 마나 한 이야기요.ㅎ 뭐, 제가 이렇게 하나 마나 한 이야기라고 해서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수많은 심사평을 봐왔지만, 이런 말은 당선작에 대한 립 서비스 차원으로 보면 될 것 같아섭니다.
참, 그리고 이 해는 소개한 당선작 외에도 동일인의 「홈커밍데이」라는 작품도 함께 당선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이렇게 간혹 그해 당선작을 소개하면서 한 작품이 아니라 당선자의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소개하는 걸 보는데요. 이런 경우는 두 작품이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당선작 한 편만 소개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미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 심사평에서 기분에 쏠린 작품이 많아서 실망한 걸로 봐선 후자일 테지만, 심사평 말미에서 이 응모자가 첫 시집을 낸다면 누구보다 먼저 시집을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은 속마음이라고 한 걸 보면 전자일 수도 있겠네요.
시를 읽어보면 제목도 어렵지 않고, 내용은 더 어렵지 않으니 사실 분석할 만한 것도 많아 보이진 않습니다. 한 줄 한 줄 무슨 말인지 정확히 해석하자면 당사자가 아닌 바에야 좀 버벅거릴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대충 감은 잡힐 겁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시는 무엇을 말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외로움(무엇)을 말하고 싶은데 직접적으로 외롭다는 말 대신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외로움을 말할지를 고민하는 거죠. 가장 흔한 방식으로 잎이 거의 다 떨어진 나무에 몇 개의 잎만 매달려 있을 때 우리는 문득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때 남은 몇 개의 잎은 그냥 단순한 나뭇잎이 아니라 외로움의 객관적 상관물이 되는 식이죠. 참고로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표현은 엘리엇(Eliot, T. S.)이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럼, 내용을 대충 살펴봅시다. 시적 화자가 극장에서 영화를 봅니다. 화자에겐 영화가 별로 슬프지 않죠. 하지만 옆을 보니까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우는 겁니다. 화자는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저 남자는 그렇게 울고도 왜 또 우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우 다들 있지요?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웃는다거나, 별로 슬프지도 않은데 우는 사람. 이때 극장을 나서면서 에이, 시시하네. 재미없네. 뻔하네. 말하곤 술이나 한잔하러 가면 시는 안 나오는 겁니다.ㅎ
다행히 시적 화자는 술 한잔하는 대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를. 뭔가 인과관계가 있으니까 저 남자가 서른다섯 번을 울고도 또 울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화자가 놓친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봅니다. 슬픔을 준비한 복선이 뭐가 있었나 지나간 장면을 떠올려보는 거죠. 그런데 그게 왔다리 갔다리 합니다.ㅎ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니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왜냐고요?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요.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왜 그럴까요? 맛있게 먹은 팝콘일 텐데요. 그건 바로 화자 역시 무언가 놓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몰라섭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 있지 않나요? 누군가 웃긴 얘기를 해서 남들은 다 웃는데 혼자 이해 못하고 뭐가 웃긴지도 모르면서 어설프게 웃는 경우요. 그러니까 화자는 괜히 팝콘을 쏟아버리면서 분풀이합니다. 근데 이게 화자만 그런 게 아니군요.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여기서 이런 이야기라는 건 뻔한 이야기,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겠고,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라는 건 서른다섯 번이나 울고도 또 우는 관객이 있다는 걸 모르면서도 화자나 등 뒤에서 중얼거린 누군가처럼 다른 사람들도 다 뻔하다고 생각할 거라면서 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러니 화자는 그런 세력이 되지 않으려고 다시 궁금해합니다. 뻔한 것들엔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는 미안함이 없는지를요.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화자는 우는 남자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공통점이라면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을 가졌다는 거겠죠. 우는 남자에겐 텅 빈 극장이 슬픔일 테고,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감정에 빠져 있겠지만, 화자는 다릅니다. 텅 빈 극장엔 슬픔이나 불행을 느끼지 못한 새떼들(화자나 등 뒤에서 중얼거린 누군가와 같은 사람들)만 날아다니죠. 그러니 다른 시간대(즉, 극장 밖)로 그 감정을 가져오지 못하고 술이나 한잔하면서 잊어버리고 그런 영화는 뻔하다고 말하죠. 말하자면 영화로 파생된 감정의 확장을 경험하지 못한달까요.
이런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합니다. 친구든, 연인이든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한 사람은 아주 감동적이었다면서 여전히 영화 이야기를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별로더라. 너무 뻔하다면서 쉽게 잊어버리죠. 그렇다면 이 시가 말하고 싶은 건 뭘까요? 아마도 그건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적극적 공감일 겁니다. 그건 바로 마지막 시구에서도 드러나죠.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화자는 서른다섯 번을 울고도 또 우는 남자처럼 자신도 감정이 없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언제요? 맞아요. 사랑하고 있을 때는 화자 역시 슬픈 꿈을 꾸기도 한다고요. 자신의 감정을 돌보는 것도 자신을 사랑해야 가능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행위 역시 타인에 대한 사랑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개인의 기분에 쏠린 작품이라는 말도 맞는 말이겠고, 하나 마나 한 말이라고 언급했던 섬세한 느낌의 표현이 시의 풍부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되었다는 말도 맞겠고, 숙고와 머뭇거림에서 길어낸 사유를 자기의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능력도 맞는 말이네요.
여기서 ‘자기의 리듬’이라는 게 감정적 공감에 관한 주제를 흔하디흔한 극장의 경험으로 풀어낸 걸 보면서 역시 시는 ‘무엇’이 아닌, ‘어떻게’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걸 다시금 배웁니다. 당선작으로 함께 뽑은 「홈커밍데이」 역시 화자의 내밀한 감정에 관한 이야깁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문구가 생각나더군요. 흘러간 청춘에 관한 소회랄까요.
이 작품에 관해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시를 습작시라면서 보여줬다면 저는 별로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너무 단순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신춘문예 당선작이라고 떡~하니 올라오면 그제야 달라 보이죠. 이게 바로 인쇄 효과라고 하더군요. 인쇄된 글과 인쇄되지 않은 글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게감에서 차이가 난다는 거죠. 그럴 때 독자들은 쉽게 비판하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모르는 장점이 있겠지, 내가 시를 보는 눈이 아직 부족한 거겠지. 대개 그렇게 생각하죠.
이 작품이 저는 별로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신춘문예 당선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수준을 가져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섭니다. 제가 그동안 소개한 시들은 시간이 지났지만, 올해 다시 응모하더라도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지만, 오늘 소개한 작품은 심사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품입니다. 소품으로 취급하려고 작정한다면 당선 사유는 순식간에 탈락 사유로 바뀔 수도 있는 게 심사평이니까요.
제목도 군더더기 없이 그냥 「멜로 영화」라고 단순화시킨 것도 당선되고 보니 긍정적인 기능을 한 것 같네요. 여기서 괜히 타인의 공감을 끌어내는 감정 운운하는 서술어가 들어갔다면 결과론적으로 마이너스였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 영화라고 꼽을만한 작품 한 편씩은 있을 텐데요. 만약 소개팅 자리에서 상대가 ‘람보’나 ‘터미네이터’ 혹은 '사랑과 영혼'을 인생 영화라고 꼽았을 경우와 예술영화를 꼽았을 때 어느 쪽에 더 공감을 많이 할까요? 상대가 아무리 감명 깊게 봤다고 해도 우리는 아, 그 액션영화, 혹은 아, 그 멜로 영화. 이렇게 단순하게 뭉뚱그려서 한 수 접지 않을까요? 그래선지, 이 작품은 제목부터 단순하게 ‘멜로 영화’라고 정한 것부터가 타인의 공감을 더 부각시킨 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서 배운 것은 신춘문예 당선작이라고 해서 엄청난 작품은 아니라는 것과, 반드시 어렵게 써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저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극장에서 나와 다른 타인의 감정을 그저 ‘멜로 영화’라고 치부하는 데서 출발한 사유가 타인을 향한 공감의 결여로 이어지고, 이는 곧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의 메마른 정서를 돌아보게 하죠.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은 어쩌면 아주 사소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네요.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당신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에 영원을 담으라.”
이 시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를 여는 첫 연입니다. 사소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한 알의 모래알과 한 송이 들꽃에서 시인은 우주와 천국을 봅니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이 시를 평생 가장 사랑한 시로 꼽았다더군요. 예전에 어디 가십난을 보니 그는 이 시의 첫 연을 보고서 스마트폰을 만들 꿈을 꿨다고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구를 스마트폰 광고 문장으로 써도 손색이 없어 보이지 않나요?
오늘 소개한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런 시선의 차이가 얼마만큼의 차이를 가져오는지도 배웠고요. 저는 가끔 밥, 떡, 방, 길, 별, 손, 발, 벽, 빵, 물, 술... 이렇게 한 글자로 된 단어를 볼 때면 그 성질에 맞게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내일부터 술을 밥으로, 떡을 물이라 불러야 한다면 어떨까요? 지금이야 당연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겠죠. 그만큼 우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겁니다.
아래 영상은 그런 고정관념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한강 소설가의 문장입니다. 한번 보시길요.
https://www.youtube.com/watch?v=E6xCs9-hLu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