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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Apr 29. 2021

아이들은 어디서 책과 사랑에 빠질까

꼬다리


대전 K서적을 찾은 건 10여년 만이었다. 소설 한권 사려는데 시내 대형서점까지 너무 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고향을 떠난 이후 처음인가. 군 휴가 중 한 번쯤 왔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정확지 않았다.


서점 내부는 그대로였다. 꼭 닮은 얼굴에 쓴 안경까지 비슷한 형제가 번갈아가며 카운터를 봤다. 어릴 적엔 그들을 구분하지 못해 “아저씨” 하고 뭉뚱그려 불렀다. 이날은 누구였을까.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어색해 구매할 책만 계산대에 올렸다.

“카드인가요.”, “네.” 빠르고 건조하게 거래가 끝날 무렵, 아저씨가 컴퓨터 화면에 ‘조문희’ 글자를 타이핑하는 모습이 보였다. “문희, 이제 결혼할 때 되지 않았나?” 당황한 나는 아직 멀었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여전히 그대로시다 횡설수설했다. “저 기억나세요?” 질문에 아저씨는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어릴 때랑 똑같은데.”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요즘도 책 많이 보니?”

어릴 적 엄마는 내가 책 읽는 것을 싫어하셨다. ‘쓸데없는’ 책을 보느라 정작 공부엔 소홀하다는 이유였다. 잔소리를 피해 찾은 곳이 서점 구석이었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으로 시작해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의 소설까지 읽었다. 주말 점심에 찾아간 책방을 꼬르륵 소리에 나설 때쯤이면 해질녘 살포시 가라앉은 공기가 나른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책의 여백 너머 서점 아저씨의 다리가 보였다. 간혹 걱정하는 투로 “엄마가 안 찾으시니?” 말했던 기억에 ‘이제 집에 갈 시간인가보다’ 생각했다(아이들도 ‘가라’는 신호는 기가 막히게 안다). 책장을 덮고 일어서려는 찰나, 아저씨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의아해하며 아저씨 얼굴을, 다시 손끝을 보니 도서상품권이 있었다. “보고 싶은 책 있으면 이걸로 사서 봐라. 좋은 책은 여러 번 읽어도 좋단다.” 그때 처음 떠올린 생각이 ‘집에 책 들고 가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걱정이었나, ‘학교 사물함에 두면 되겠다’는 기쁨이었나.


시간은 흘러 고3이 됐고, 서점은 문제집을 살 때만 가끔 들르는 곳이 됐다. 책을 탐독하며 머물 시간은 없었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보다 머리 하나 이상 자란 나이, 나는 아저씨가 나를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릴 때랑 똑같다’니. 그제야 깨달았다. 서점을 찾은 어른은 어릴 적 책 좋아하던 아이가 자라난 모습이란 걸.

영국의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독서는 고독이 주는 기쁨”이라고 했다. 책 읽기가 혼자 하는 행위임을 전제하는 말이다. 집중이 필요해 그렇겠거니, 대충 끄덕이며 지나쳤던 구절인데 새삼 어색하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꾸준히 책을 볼 수 있었을까. 책을 자주 찾는 건 ‘내가’ 좋아해서이지만, 그 선호와 습관이 형성되기까지는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알라딘, 교보문고 같은 온라인 대형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다가도 대학로 ‘책방 이음’이 폐점했다는 문자에 불쑥 속상한 것은, 도움의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서일 것이다.

코로나19 탓에 도서관 찾기도 어렵다는데 요즘 아이들은 어디서 책과 사랑에 빠질까. 이따금 책 읽는 얼굴에 웃음 건네는 어른 한명쯤 있을까. 다음에 또 K서적을 찾게 되거든, 아저씨께 ‘요즘엔 무슨 책을 보시냐’고 여쭤봐야겠다.



*2021년 4월29일자 주간경향 '꼬다리' 코너에 실은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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