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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06. 2023

전쟁이 말하지 않는 전쟁들

231206

  김민관 기자의 책 <전쟁이 말하지 않는 전쟁들>(2023)을 읽었다. 책을 펴기 전까진 대부분 내용을 이미 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배경과 진행 상황을 특별히 잘 알아서가 아니라, 출간 전 원고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성된 책을 보는 것은 또다른 경험이었다. 읽는 시간 중 4분의 1 가량을 콧속 깊은 구석과 눈밑이 얼큰한 채 보냈다.



  전쟁 현장은 저널리즘의 가치가 가장 두드러지는 공간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생존자는 힘이 약한 반면 가해자는 목소리가 크다. 자기 정당성을 힘주어 말하고, 사실관계를 왜곡하기도 쉽다. 시간이 가기 전에 현장을 기록하고 목격자 증언을 전해야 겨우 이 비대칭에 대응할 수 있다. 상호 참조점이 될 수 있기에 이런 기록은 다양할수록 좋다.

  기자로서 김민관도 "'전쟁 범죄'에 대한 기록"을 우선 목표로 삼았던 듯하다. 그는 2022년 3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도합 50일 남짓 시간을 우크라이나 또는 접경 국가에서 보냈다. 이 책의 특징은 뉴스 보도로 기록을 마친 그가 뉴스 화면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한 '후일담'이란 점이다. 기록의 맥락을 담았다는 점에서는 '기록에 대한 기록'이다.

  김민관이 처음 책 일부 내용을 쓴 시점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그가 겪은 바를 더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지만 고민했던 것 같다. 그가 평소 지닌 따뜻한 시선은 취재일지에서도 두드러졌다. 이  감상을 적절한 장면과 연결할 수 있다면 비극의 실체를 교훈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굳이 훈수두는 사람 없어도 알아서 잘 써낼 사람이지만 그가 가진 재료가 귀해서 더 신경썼던 듯하다. 물성이 있는 책자를 손에 쥔 지금에야 그가 폴란드, 루마니아, 우크라이나를 돌아다니며 느꼈을 두려움과 걱정, 고민을 느낀다. 미안하다.

  알고 지낸 지 벌써 15년, 이 책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건 오직 그가 폴란드 경찰에 붙잡혔을 때 근심했다는 대목 뿐이다. 그의 걱정이 허구라서가 아니라, 폴란드 경찰 입장에서도 그의 잘 다듬어진 근육이 예사롭지 않아 두려웠을 거란 생각에서다. 허술한 장비, 조율되지 않은 현장 상황,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폭격, 말이 통할지 불투명한 취재원 앞에서 그가 매일 느꼈을 아득함을 짐작해 본다. 그 와중에도 그는 현장성 있는 기사를 썼고, 틈틈히 사진 촬영과 글쓰기를 병행해 기사에 담지 못한 기록을 들고 귀국했다. 만날 때마다 농담 소재로 삼는 유별난 그의 성실함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책의 초반, 현아양과 인터뷰한 전후 그가 바라본 풍경을 생각한다.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에서 현아양이 어머니 올가씨를 폴란드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떠나는 순간의 기록이다.

  "현아양을 태운 차가 출발하자, 올가씨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의연해 보였던 올가씨는 차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타고 왔던 차량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이날의 뉴스를 돌려볼 때마다 모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별의 인사를 나누기도 모자랄 시간에 내가 들이댄 마이크 때문에 못다한 말이 남은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가 남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뒤늦게 찾아온 후회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 36~37p

  현장 분위기를 잘 전한 인터뷰를 방송해놓고도 그의 마음 한켠엔 찜찜함이 남아있었을 테다. 성공의 반짝임에 숨은 실패의 기록이다. 체르니우치 시내 야경을 담고자 호텔 발코니에 삼각대를 펼쳤던 그가, 지배인의 경고를 듣고서야 '이곳 사람들에겐 카메라가 총으로 비칠 수 있겠구나'고 깨닫는 장면에선 나도 함께 아차 싶었다.

  어쩌면 이 책 전체가 이런 오해실패, 후회의 잔여물 아닐까. 제대로 취재하지 못한 아쉬움, 일면을 잘 전달했다고 칭찬받지만 화면에 담지 못한 사연이 여전히 많다는 걸 스스로는 알아 느꼈을 민망함, 비극을 한참 살아야하는 이들 앞에서 펜과 카메라가 어찌나 짧고 무력한지 아는 자의 부끄러움. 하지만 그 미흡한 교량마저 없다면 어떻게 타인의 세계로 건너갈 것인가. 나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후회라고 믿는 쪽이다. 안다는 믿음은 쉽게 무례함으로 미끄러지는 반면 모른다는 자각은 더 알고자 하는 노력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미안함이 화면에 담지 못한 일담으로 이어졌듯이.

  책에 실을 글, 서문, 후기를 구상하며 그가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지었던 표정을 기억한다. 내가 '이렇게 쓰면 어떨까' 아이디어를 내면 이따금 고개숙인 채 짓던 그의 미소를.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모든 이들의 삶에 희망과 용기, 축복이 가득하기를 빈다"는 책 속 감사의 말과 "이렇다 할 좌우명은 없지만 인생을 늘 낙관하려 노력한다"는 그의 자기 소개 모두 진심이란 것을 안다. 두려움과 절망의 현장에서 이따금 인류애를 엿본 그의 기록 덕분에 나도 '전쟁'이란 단어에서 떠올리기 쉬운 비극적 이미지 너머 전쟁 속 인간의 다양한 삶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별 문제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취재 현장에 복귀한 그에게 축하와 응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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