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이나 진학 자소서에 자주 보이는 질문 중에 하나는 '존경하는 인물 또는 롤모델이 누구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꼭 고정되어 있기보단 그때 그때 생각과 상황, 삶의 비전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대외적으로 밝혀야 하는 자소서 같은 경우는 그 분야의 전문가나 입지전적인 인물 등 진학과 취업 목적에 맞는 인물을 고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어렸을 때, 존경하는 인물로 신사임당을 자주 꼽았다. 나는 발랄하다 못해 정신없고, 왈가닥인 편이어서 현모양처의 전형인 신사임당을 존경한다는 것에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그렇지만 이유가 있었다. 난 그녀의 위인전에 나와있는 무능한 남편의 뒷바라지 일화나 훌륭한 자식 교육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화가인 신사임당을 존경했다. 직업화가로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또 여성의 사회진출이 극도로 제한된 사회에서 그 명성이 이어져왔다는 것은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초등학교 고학년 때 했었는데 최근 나오는 신사임당의 재평가를 보면 괜히 먼저 알아본 것 같아서 뿌듯했다. 게다가 최근에 나온 기사들을 보면 그녀는 남편을 돕는 보조적 위치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자식 교육과 집안 경영을 이끈 인물로서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후대 유교학자와 일제강점기 시대 위정자들에 의해, 그녀의 평가가 순종적인 여자로 윤색된 것이었다. 이런 이미지가 너무 강해 5만원 화폐 인물로 뽑혔을 때 많은 이들, 심지어 여성계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5만원에 새겨진 이유가 자신의 교육철학과 예술적 업적을 가진 인물로서 인정받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 여러 번 삶의 궤도를 수정하면서 롤모델은 자주 바뀌었다. 최근 제일 자주 이야기했던 롤모델은 '송은이'님이다.
현재 330여 회를 넘어가고 있는 팟캐스트 비밀보장(이하 비보)을 2회부터 들은 팬, 소위 땡땡이로서 사심이 들어있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인물이란 점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 업로드 되었던 방송에는 때때로 '방송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뭐 안되면 이 마이크 다시 상자 고대로 넣어서 중고나라에 팔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만큼 그들도 확신이 없이 시작한 팟캐스트였다. 사실 원래 연예인들은 대중과 제작진의 '선택'을 기다리는 인물들이었다. 한 때의 인기여부와 상관없이 현재 선택받지 못하면 끝인 직업. 게다가 2010년도 초중반, 그 당시는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로 떠오르고, 남성 메인 진행자를 필두로 친구들(대개 남성 게스트)끼리 장난치며 노는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질 때 였다. 여성은 가끔 나오는 일회성 게스트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여성 개그우먼들은 자신들의 무대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리고 팟캐스트란 단순한 형태에서 vivo TV로 확장하며 콘텐츠를 기획하는 콘텐츠 제작사로서도 커졌다. 사실 처음 유튜브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괜한 도전이라 생각했다.(실제로 비보는 팟캐스트가 아닌 다른 플랫폼으로 잠깐 옮긴 적이 있는데... 암흑기였다) 그러나 그 vivo TV 도전은 성공했고, 어엿한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또 그 이전 콘텐츠들의 아류가 아니라 독창성을, 자극보단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이제 vivo는 그 자체로 방송계의 브랜드가되고 있다.
그 외에도 최근 영화의 프로듀서이자, 감독, 배우로서 활약하는 문소리님, 나이 듦에도 노배우의 미를 여지없이 뽐냈던 윤여정 님 등 나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때그때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여자였다.
소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인정받았다. 물론 성별에 상관없이 대단한 노력으로 성취를 이뤄냈다면 그것은 존경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찌 됐든 나는 여성으로서 정체성이 강한 편이고, 여성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리천장을 뚫어야 한다는 것에 깊이 공감한다. 그 유리천장이라는 것은 명시적이거나 어느 한 기업의 한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과 시선, 평가, 인식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시대와 대중이 바뀌지 않는 한 공고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열거된 여성들은 그 유리천장의 허들을 넘은 인물이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대중의 인식들을 바꿔나가는 인물들이다. 성공한 여성인물들중에 오히려 그 유리천장의 인식을 내재화하여 자신이 올라온 구멍을 막거나, 자신의 힘든 여정을 후배들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롤모델이라면 그들의 성취 뿐만 아니라 함께 나아가자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나 역시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