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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Apr 11. 2023

(2) 갈아 만든다

1995년 여름, ‘갈아 만든 홍사과’라는 제품이 출시된다. 그렇다, 배보다 사과가 먼저였다. 빠르게 인기를 얻은 음료는 기존의 과일 주스에, 과육을 첨가한 것이었다. 당시엔 신선한 시도였다. 매 모금, 씹히는 과일 원료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배’에 도달하기까지, 해태음료는 감귤, 복숭아, 당근, 딸기 등 닥치는 대로 갈아 선보였다. 맛볼 때마다 원재료를 떠올리게 하는 음료는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험을 선사했다.


배만큼이나 숙취에 좋을 ‘갈아 만든 녹차’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녹차는 정말 숙취에 효능이 있다.) 그런 음료는 어떤 모습일까. '갈아 만든' 시리즈만큼 잘 될까? 잠시만 생각을 해보면, 그것은 이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녹차 라떼, 녹차 아이스크림, 녹차 스콘으로 변주되곤 하는 분말차. 다른 이름으로 말차. 이미 흔하게 볼 수 있는, 널리 알려진, 갈아 만든 녹차다. 티백처럼 찻잎을 물에 우려 마시는 것이 ‘침출차’고, 찻잎을 갈아서 물에 타먹으면 ’가루차‘, 혹은 ’말차‘가 된다. 물론, 두 음용법의 재료는 녹찻잎으로, 같다.


하지만 찻잎을 어떻게 섭취하느냐의 문제는 여러 방면에서의 크고 작은 차이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침출차는 우려 졌을 때의 맛과 향이 중요하다. 수색과 찻잎의 모양 등이 고급 침출차를 가르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찻잎이 통째로 섭취되는 말차는 이파리 자체가 쓰고 떫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재배 기술이 동원된다.


한 가지 예시가 차광재배다. 녹차밭을 지나가다 보면 차나무에 천을 덮어놓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차나무가 햇빛을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식물은 햇빛을 받아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영양소로 바꾼다. 빛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일어난다. 우선, 더 많은 햇빛을 받기 위해 몸집을 키운다. 옷장 속에서 기른 콩나물이 길쭉길쭉하게 장신으로 자라는 것처럼, 빛을 차단한 차나무는 줄기가 길어지고 이파리가 넓어진다.


그리고 두 번째, 영양소를 잘 만들지 못한다. 녹차에는 '카테킨'이라는 성분이 있다. 차의 쓰고 떫은맛을 내는 부분인데, 진화학자들은 이 카테킨이 차나무가 초식동물들에게 뜯어먹히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좌우지간 인간에겐 항염증 효과, 항산화 효과, 체지방 분해 효과 등의 유익이 있다. 햇빛이 결핍된 차나무는 잡아먹힐 위협보다 우선시된 생존 과제 앞에 카테킨 만들기를 포기하고 아미노산만 가득하게 된다. 아미노산은 녹차의 단맛과 감칠맛을 담당한다. 차의 "맛있는" 부분이다.


아주 오래된 예전의 일이다. 회사에서 지상 가장 맛있는 말차를 키우기로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햇빛이 100% 차단되는 암막 집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차나무를 키운 것이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을 줄 아시는가. 정말 쓰거나 떫은맛이 1%도 없는, 감칠맛 100%의 찻잎이 재배되었다. 카테킨은 없고 아미노산만 있는 차. 슬프게도 이 말차는 팔리지 않았다. 미원인 줄 알았다나. 느끼할 지경에, 한국인의 기호에 맞지 않았다. 결론은, 재배 노하우에 따라 녹차의 맛 비율은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고, 최적화된 맛도 일정하게 길러낼 수 있다는 것.


재배기술과 더불어 분쇄 기술도 중요해진다. 옛날 일본에선 말차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고운 종이에 가루를 올리고 손가락으로 쓱 밀었다. 지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통과다. 그만큼 입자가 균일해야 하며, 물에 타도 입자가 잘 보이지 않아야 했다. 말차는 입에서 무언가가 씹히는 '갈아 만든' 시리즈의 성공요소가 반대로 적용되는 음료다. '갈아 만든 녹차'는 원재료가 느껴지지 않음에서 품질이 갈린다.


하지만 여기서도 함정이 있다. 입자가 무조건 고울수록 좋은 건 아니다. 말차를 더 잘 만들고 싶었던 어느 회사는 맷돌로 갈린 입자를 재현할 최첨단 기계를 도입한 적이 있었다. 이 기계는 비비탄처럼 생긴 일정한 크기의 구슬과 찻잎을 통돌이 같은 것에 함께 고속회전 시키며 분쇄하는 기계였다. 멋지지 않은가. 그런데 입자가 너무 고와서 물에 잘 풀리지 않았다. 가루가 덩어리가 되었다. 이 또한 팔리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갈아 만든 녹차 한잔을 제대로 만들기란, 여간 일이 아니다. 잘 만든 말차는 어마어마한 기술력의 집약이자 '정도'의 예술이다. 이 과정으로 말차는 본래의 나무였던, 이파리였던 형체를 완전히 잃는다. 가루가 된 녹차는 싱그러웠던 원재료의 신선함을 전달할 수 있을까. 씹혀선 안 되는 원료를 소비자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을까. 갈아 만든 녹차의 고민이다.


말차를 내어주기 전, 눈앞에서 직접 갈아주는 건 어떨까. 티하우스에서 제조되는 말차가 파릇하고 온전한 이파리의 상태에서 시작할 수 없을까.


커피숍의 원두콩 보관함이 속이 보이게 투명하게 되어 있는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소비자들이 커피를 마실 때, 원두의 상태를 볼 수 있게 한 것은 신선도와 품질에 대한 보증일 뿐만 아니라, 원료에 대한 소개다. 크기, 색감, 모양 등으로 느껴지는 원료에 대한 오감 경험이다. 자연에서 온 것들은 그렇게 소개되어야 마땅하다. 사람의 손이 최대한 덜 닿은 모습부터.


말차 회사의 남은 욕심은 티하우스 안에서 분쇄기계를 돌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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