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차 타고 인천공항에 가기
여행은 항상 어렵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지금으로부터 4시간 전,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내가 경찰차를 탈거라 생각이나 했을까?
“준비 다 됐어?” 아버지가 물으셨다.
“응, 이제 출발하자.”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조수석에 앉아 멀어지는 동네를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겨울을 피해 한 달 동안 따뜻한 나라로 떠나는 것도 좋았고, 회사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출발한 지 20분쯤 지났을 때, 차가 이상했다. 약간 꿀렁거리는 것 같았다.
"뭐야, 차 퍼지는 거 아니야?"
라고 농담을 뱉는 순간 차가 멈췄다. 어이없는 상황에 아버지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뒤에서 들리는 경적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고, 나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지금 차가 멈췄어. 데리러 와 줄 수 있어? 보험사 올 때까지 기다리다간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거든”
“지금 바쁘니까 112에 전화해.” 경찰인 오빠는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만 남기고 끊었다.
이런 일로 전화를 해도 되는지 의심 적었지만, 일단 6년 차 경찰의 말을 믿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 긴장된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상황과 위치를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타고 가던 차가 퍼져서 지금 올림픽대로에 갇혔는데, 일단 보험사는 부른 상황이고요. 제가 지금 비행기 시간 때문에 빨리 가야 하는데 걸어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도로까지만 저를 데려다주시고, 저희 차 때문에 막힌 도로를 정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행히 도로 합류지점이라 모든 차량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서 사고는 나지 않았습니다. ”
신고접수가 된 후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몇 번 더왔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전화였다. 안 그래도 꽉 막힌 올림픽대로가 우리 차 때문에 더 밀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보험사가 올 때까지 밖에 서 있겠다고 하셨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경찰차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자동차가 멈추던 순간을 되짚어 보는데 기시감이 느껴졌다. 8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여름방학 프로그램 때문에 러시아의 한 대학교에 머물던 때였다. 나와 룸메이트는 종종 저녁 마트에 들려 군것질을 사오곤 했다.
기숙사 엘리베이터는 멈춘 게 아닌 가 종종 의심할 정도로 속도가 느련 편이었다. 그날 저녁도 마트에 가기 위해 기숙사 엘리베이터를 탔고, 평소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다른 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리베이터 멈추면 진짜 웃기겠다’는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나와 친구는 “대박, 미친, 진짜 멈췄네.”를 반복했다. 겁도 없고 철도 없던 우리는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본 엘리베이터 추락에 대처하는 포즈를 취하며 깔깔댔다. 한참을 웃다가 정신이 든 나는 단톡방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탈출했다. 탈출이라 하기엔 거창한데, 단톡방을 확인한 학생이 다른 층에서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정상적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저 멀리 경찰차가 보였다. 보험사가 먼저 왔으면 뻘쭘할 뻔했는데, 경찰차가 먼저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경찰분들은 우리 차 뒤에 경찰차를 정차한 뒤 교통을 정리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타고 갈 다른 차를 불러주셨다. 범죄자가 아니라서 못 타는 건지, 캐리어를 싣을 공간이 없어서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혼자만 차 안에 있기 뻘쭘하고 죄송해서 밖에 같이 서있다. 한겨울에 반팔차림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경찰차를 기다리는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긴팔을 가져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기분 탓인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보험차가 먼저 도착할까 봐 초조해질 무렵, 다음 경찰차가 도착했다. 알록달록한 색의 경찰차가 아닌 짙은 회색의 suv였다. 자세히 보니 자동차 앞에 ‘암행’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말로만 듣던 ‘암행순찰차’였다. ‘암행순찰차’에 감탄할 새도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탑승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도와주셔서.” 막상 경찰차에 타니 사소한 일로 경찰을 부른 것 같아 민망함과 후회가 밀려와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괜찮아요. 시간 안에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경찰분들은 응원해 주며 가까운 지하철역에 나를 내려주었다.
경찰분들의 응원에 힘입어 지하철을 타자마자,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동선을 짰다. 스마트패스, 모바일 체크인, 항공사 카운터, 유심 픽업 위치 등을 미리 발급하고 확인했다. 덕분에 모든 절차를 빠르게 통과한 후 제시간에 게이트에 도착했고, 지금은 비행기가 30분이나 연착되는 바람에 여유롭게 글을 쓰는 중이다.
6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1달 동안 미국여행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일어나 핸드폰 알람을 끄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는데, 핸드폰이 먹통이었다. 전원 버튼을 몇 번이나 눌러도 화면은 까맸다. 액정에 금이 간 건 몇 달 전이었고, 기능에 문제가 없어서 계속 사용 중이었는데, 하필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에 고장이 난 것이다.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고, 아침 일찍이라 문을 연 핸드폰 가게도 없었다. 일단 엄마의 오래된 공기계를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공기계는 화질도 구렸고, LTE도 안 됐고, 배터리 수명도 짧았다. 결국 1달 동안 공기계를 들고 여행을 다니면서 디지털 디톡스를 했다.
여행 첫날 벌어진 ‘핸드폰 블랙아웃 사건’은 액땜이 아닌, 우당탕탕 여행의 시작이었다. 예약한 뉴욕 숙소는 공사 중이었고, 보스턴 호스텔에서는 현금을 털렸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엘에이 가는 버스를 놓쳐, 체크아웃한 호텔로 다시 돌아갔다.
젠가를 완벽하게 쌓은 순간, 블록은 무작위로 빠지기 시작한다. 여행도 그렇다. 블럭이 빠지듯 발생하는 사건사고가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원망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웃어넘기게 된다. 나도 원래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었지만, 수차례의 여행을 거치며 변수가 들어갈 자리를 넉넉하게 마련하게 되었다.
인생도 여행이라 생각하면 이런 변수가 꽤 재밌어진다. 물론 큰 재산이 털리거나 건강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라면 여행을 중단해야겠지만, 약간의 현금 손실이나 스케줄이 틀어지는 정도라면 웃고 넘길 수 있어진다. 나아가 변수로 인해 만나게 되는 인연과 시간들은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급작스레 끼어든 변수를 즐기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것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다. 나는 아직 내게 필요한 크기를 찾아가는 중이다.
시트콤 같은 하루였다. 올림픽대로 위에서 차가 퍼졌고, 한겨울에 반팔차림으로 비바람을 맞은 채, 경찰차를 탔다. 6시간 뒤에 도착할 푸켓을 상상하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 일어난 일이 액땜일지, 우당탕탕 여행의 시작일지 알 수 없지만, 내일이 기대되는 걸 보면 지금 꽤 행복한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