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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Apr 07. 2024

은행과 크리에이터

무에서 유를 만드는 단 2가지 방법

*해당 글은 ‘자본주의 연속극(가제)’ 시리즈의 일부로 부정기 연재 예정입니다.



이 돈은, 이 노래는 어디서 온 거지 


돈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 돈 버는 거 말고. 저수지처럼 있는 돈 끌어온 돈 말고, 말 그대로 세상에 물을 새로 생성하는 법 말야. 세상에는 돈을 만들어내는 법이 존재하는데, 세상에 나와있는 돈을 돌려쓴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오늘 아침 사 먹은 커피값은 내 은행계좌에서 나왔고, 내 은행계좌는 근로소득을 챙겨준 사장님의 기업체에서 나왔고, 기업의 돈은 투자자와 은행에서 나왔고… 이렇게 거슬러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멈추게 돼. 상상의 투명천장에 부딪히거든. 웃긴 건 정기권 충전할 때랑 결혼식 축의금 낼 때 빼곤 꺼내지도 않으면서 돈을 상상할 땐 현찰을 떠올린다는 거야. 이래서 개념이 무섭다니까. 


최근 비비의 ‘밤양갱’이라는 노래가 나왔어. <라디오스타>에 나와 자중하면서 제 얘기를 하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밤양갱’은 이효리, 아이유에 이어 오혁 AI 커버에 이어 이미 세상을 떠난 김광석 AI 커버 버전까지 나오는 등 진정한 낙수효과를 낳았어. 나도 밤마다 숏츠를 보면서, 길거리를 걸으면서 달디단 밤양갱을 흥얼거렸지. 신기하지 않아? 세상에 없던 노래가 무에서 유료 뿅 나타난다는 게. 내가 갖고 있는 아이폰에는 반도체가 들어가고, 반도체는 원자재인 광물에서 왔고, 광물은… 하며 거슬러 오르는데, 기원이 딱 설명되지 않는 노래가 세상에 출현해 많은 이들의 고막을 요동시킨다는 게.


은행과 크리에이터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다는 거야. 그리고 크리에이터와 은행의 차이점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해. 은행도 크리에이터도 세상에 특정 대상을 생성한다는 사실은 같지만, 둘은 생성 원리가 달라. 크리에이터는 은행처럼 복사하지 않아. 물론 크리에이터가 만든 음악이, 글이, 그림이 전작과 닮을 수야 있지. 하지만 그걸 다 압축시킨들 그 곡이 나오진 않아. 하지만 은행은 그게 가능해. 복사. 




돈 복사의 원리


지급준비율¹이라고 들어봤어? 그러니까 바로 이 지급준비율이 금융 자본주의의 돈을 찍어내면서도 그를 합리화 하는 알맞은 빌미야. 철수가 은행에 와서 1만원을 맡겨. 그럼 은행은 그 1만원을 고이 간직할까? 절대. 이튿날 민지가 와서 1만원을 빌려달래. 빌려줘야지. 철수 0원, 은행 0원, 민지 1만원? 세상의 돈은 1만원 내에서 돌고 도는 걸까? 네버. 은행은 지급준비율만 남기고 민지에게 1만원을 빌려줘지급준비율은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예치했을 때 은행이 언제든 내어줄 수 있도록 꼭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돈으로 사람들이 예치한 돈의 비율을 말해가령 지급준비율이 10%라 하면 1000원을 남기고 1만원을 빌려주는 거지. 1000원이 어디 있냐고

만들면 되잖아돈 복사로.


스스로 자신을 창출하는 금융 자본의 놀라움. 그런데 이 지급준비율이라는 게 참 재미있는 게, 만약 그렇게 줄줄이 대출을 받은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저 현금 필요해요, 주세요”하면 방법이 없어. 줄도산 나는 거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에 자본주의가 지속될 수 있어. 이걸 보면 어릴 때 명절 고속도로에서 아빠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라. 아빠, 왜 우리 차는 빨리 못 가? 앞에 차가 있으니까 그렇지. 앞의 차가 빨리 가면 되잖아. 그 앞에 차도 있잖아. 그럼 그 앞에 차는? 그 앞의 차도 톨게이트에 걸려서… 


2023년은 무시무시한 해였어. 전세사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말해. 전세 사기로 재난 같은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말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내가 맘에 드는 집을 갖고 있단 이유로 목돈 몇 억을 턱 주는 게 웃기다고. 그런데 말야, 그건 은행도 같아. 우리가 은행의 재무건전성을 입증하라고 해? 현금흐름이 원활한지 보여달라고 해? 집주인한테 못 그러는 거랑 다를 게 뭐야? 다른 게 있다면, 나를 포함해 집단으로 ‘그(은행)’를 신뢰한다는 것 뿐이지. 정부가 그를 구제해줄 거라는 믿음하고.


시스템이 웃기다는 게 주제는 아냐.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은행에 거는 집단신뢰가 금융 자본주의를 지탱한다는 거야. 피와 살을 지닌 물성을 지닌 인간이 추상적 신뢰체계로 이 모든 걸 만들어냈어. 세상이 굴러가는 원리는 참 흥미로워. 결국 세상은 집단 추상으로 굴러가. 그게 인간 문명이고. 내가 만약 예금 3000만원을 담보로 대출을 신청하면 9750만원까지 빌려줘.² 갚을 거라는 믿음 하에. 은행도 우리를 신뢰하는 거야이미 과거완료된 자산과 몇 가지 이유만으로.




세상의 부족함으로 먹고 사는 테이커 


우린 은행에게 기대해. 3000만원 빌려주세요, 3% 이자쳐서 갚을게요. 3000만원*1.03%=3090만 원. 이날까지 꼭 갚을게요.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대출자의 다짐이 그저 허풍이었는지는 언제 알까? 기대가 현실화되지 않을 때일 거야. 흔히 버블이라고 하지. 그때가 되면 기대를 깨뜨린 쪽, 기대를 배신당한 쪽 모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돼. 채권 추심이라는 형태로 말이지. 기대한 쪽과 기대를 무너뜨린 쪽. 어느 쪽이 더 불건전할까? 기대를 걸든, 기대에 부응하든 테이커(taker) 속성은 다른지 모르겠다. 부동산PF 사태를 생각해 보라고. 사실 기대에 부합할 예상 데이터를 아무리 가져온들 기대에는 거품이 낄 수밖에 없어. 기대와 증거라니, 그만큼 연동 안 되는데 결부된 조합이 있을까? 


은행은 남의 돈을 빌려주면서 더 큰 액수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고 기대해. 그러면서 예대마진³이라는 밀당을 통해 돈의 가치를 높이려고 애쓰지어쩌겠어생성 원리가 복사인 걸복사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원본-돈에 원본이라는 게 존재한다면-의 값어치는 떨어져카피가 늘어날수록 이름값이 오를 거라 자부한 샤넬의 처지보다 못하지통화량 증가에 따른 화폐가치 하락은 필연적더 큰 수익을 바라고 빌려주지만동시에 멈출 수 없는 톱니바퀴의 덫에 걸린 거지. 대출자가 상환이라는 행위로 기대에 부합해도은행은 만족할 수 없어. 그들은 세상의 부족함으로 먹고 사는 테이커니까.


기대는 언제나 수익을 생각해. 최소한 수지타산에 부합하길 바라지. 그만한 권리가 있다면서. 그게 은행이야. 돈을 빌려주고 더 큰 돈으로 -하지만 그때 시점에는 평가절하됐을 그 돈- 돌려받길 벼르고 있지. 모든 대출이 상환되는 시점은 결코 오지 않아. 세상엔 언제나 돈이 부족할 거거든. 그래야만 해. 그래야 사람들이 대출을 일으키고, 세상에 흩뿌려진 무수한 빚만큼 그들은 먹고 살 수 있어. 은행의 돈 복사는 사람들의 지갑을 가뭄나게 하는 태생을 지니고 있어. 




제 몸 하나로 한없이 주는 기버 


크리에이터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원리는 은행과는 달라. 예측불허이기 때문이지. 우리를 매번 놀라게 하니까. ‘밤양갱’이 나오기 전 비비의 『lowlife princess』 앨범을 떠올려. ‘조또’ ‘가면무도회’ 등 상처받고 거칠어진 심성을 담은 듯한 노래를 듣다 보면, 비비의 다음 곡에 대해 기대감을 가질 순 있어도, ‘밤양갱’ 같은 노래를 예견할 순 없지. 크리에이터와 은행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기대야. 비비의 신곡을 기대한다고? 아니, 그녀에게 기대하는 건 돈과 같은 종류의 기대가 아니야. 우린 그녀가 우리에게 선사할 탁월함을 기대할 순 있어도, 그녀가 만든 아웃풋이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진 예상할 수 없지. 


크리에이터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사랑을 받으려고, 돈을 벌어들이려고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까? 그들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아. 오로지 저 자신에게 질문할 뿐. 그들에게 수익은 언제나 2번이야.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있지만 역시 2번이야.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크리에이터가 가난하다면 그럴 수 밖에 없어. 내 욕망에서 출발한 아웃풋에 세상이 바로 공감하며 지갑을 턱턱 열 리 없잖아. 곧 예술가의 빈 잔고는 내 목소리를 표현하고 싶다는 1차적 욕구와 돈과 사람들의 인정을 사고 싶다는 2차적 욕구 사이 간격이 얼마나 멀고 가깝느냐에 따라 결정돼. 비교적 상업적인 콘텐츠는 후자에 가깝겠지. 


크리에이터가 세상에 내놓는 결과물은 자기충실성에서 유래해. 돈을 벌려고 음악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것만큼 목표와 수단이 연동 안 되는 일이 있을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고 싶다’가 첫번째고, 그다음에 수익을 거두고 싶다는 마음이 따라붙는 거지. 그래서 난 크리에이터들에게 고마워.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소금 같은 음악을, 그림을, 글을 선사하는 사람들이니까. 세상을 닦거나 더럽혀주는(더럽히는 것조차 정화 효과를 내지) 음악과 문학, 그림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고, 사고를 뒤흔들고, 생활을 감미롭게 물들이는 이들에게 아주 큰 포상이 돌아가는 건 너무나 당연해. 


크리에이터가 만든 작업물은 세상을 향한 선물이야. 그들은 오로지 자신에게 제 주관, 목소리에 충실하라고 요구해. 그리고 때때로 자신 내부를 향한 질문이 세상에 가벼운 물음표를, 혹은 무거운 느낌표로 혜성충돌을 일으키지. 그렇게 제 몸 하나를 일궈 세상에 무한한 사랑을 주지. 난 크리에이터들이, 예술가들이 기버(giver)라고 생각해. 자기에 충실함으로써 세상에 복을 흩뿌리는 이들. 이것 역시 웃기지 않아? 돌려받길 바라는 마음 없이 한 일이 가장 찬란한 빛을 내린다는 게. 




무에서 유를 만드는 2가지 방법, 은행의 돈 복사와 크리에이터의 창작물. 은행이 돈을 만들려고 복사할수록 대상의 가치가 떨어지는 반면 크리에이터는 창작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을 모방하게끔 자극하면서도 스스로 가치를 드높이지. 결국 뭔가를 만든다는 건 두 유형일 거야. 밑빠진 독 같은 테이커의 낳음과 주고도 준 줄 모르고 영감의 홀씨를 흩뿌리는 기버의 낳음. 


예술가들이 돈을 아주, 많이 거두면 좋겠다. 세상의 돈을, 싹 다!





[1] 2024년 4월 기준 한국은행이 공시한 정기예금의 지급준비율은 2%. 1000만원 예금 시 20만원을 보유해야 한다. [2] 2024년 4월 기준 우리은행 예금담보대출 상품 설명에 따르면 액면금액의 95%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이자율은 1.0%. 우리은행 사이트의 예금담보대출 페이지. https://spot.wooribank.com/pot/Dream?withyou=POLON0052&cc=c010528:c010531;c012425:c012399&PRD_CD=P020000121 [3]은행이 먹고 사는 원리. 예금에 지불한 이자와 대출로 거둔 이자의 차에서 나온 수익을 뜻한다.  


참고 | <돈의 감각> 이명로 지음, 비즈니스북스(2019), <자본의 방식> 유기선 지음, 행복우물

썸네일 이미지 | Vladimir Solomianyi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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