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책리뷰.2 -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
1200페이지 넘는 은하수히치하이커보다 더 느릿느릿 읽히는 책, 그러나 읽고 나면 마음의 근육이 딴딴해지는 책 역시 또 시집입니다. 대학 때 이 분의 시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세월이 그 흔적을 싹 지웠습니다. 페북에서 이 시집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두 편, 세 편씩 밑줄 치며 소가 걸어가는 속도로 읽었습니다.
첫번째 시부터 양심을 훅 찌릅니다. 10페이지의 <외상 장부>라는 시.
"모든 책은 외상 장부 같다.
내게 뭔가를 전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 갚을 거냐고 묻고 있다."
이래서 제 책상 주변에 있는 책들이 책권자로 보였나 봅니다.
15페이지 <이유>
"신은 주방에 있다는 세간의 말은
대체로 사실일 것이다."
그렇죠. 우리의 생명을 만드는 모든 것이
이 주방에서 다 나오는 거 아닙니까?
18페이지 <사막의 병사>를 읽다가
"민주주의는 질척질척하고
가진 자들은 야비하고
권력은 추악하고" 구절에서
내 생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아 그냥 반가웠습니다.
20페이지 <히말라야에서>는
저의 마음을 더 뒤흔듭니다.
"죄 없는 자들일수록 더 많이 참회하고
적게 먹는 자들이 더 많이 감사하고
타락하지 않는 자들이 더 많이 뉘우치고
힘들여 사는 자들일수록 고행의 순례길을 떠나고
적게 살생한 자들이 더 많이 속죄한다는..."
이건 가장 인간적인 고해 아닌가 싶습니다.
34페이지 <무무소유>는
"없는 사람이 무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나"라는
구절에서 한 대 쿵 맞았습니다.
저는 리뷰를 보통 10분 안에 후다닥 씁니다.
근데 이번 리뷰는 어떤 시인의 페북리뷰 간섭에
나름 영향을 받아 천천히 수정하며 쓰고 있습니다.
평론가들처럼 쓰지도 못하고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그냥 내 마음에 쿵 하는 감정을
뜨개질 하듯이 올리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48페이지 <겨울비>
"노동이 빠져나간 몸은 퇴적암이다."
세상 모든 노동은 무언가를 퇴적합니다.
차마 말로 표현 못한 무언가를 퇴적합니다.
50페이지 <무게>
"모든 절박한 것은 무게다.
슬픔의 모든 것은 무게에서 배어 나온다."
슬픔이 무거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58페이지 <정지의 힘>
이 시는 그냥 통째로
다 외워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62페이지 <길>
늘 길을 나서고 길을 걷는 저는
"길 위에 길은 사라지고
언제나 속도만 깔려 있었다."에
내 마음의 길을 냅니다.
제가 늘 품었던 생각 하나는
68-69페이지 <버러지 만들기>에서 만납니다.
"저 의사당이 왜 필요한 거야 자신이 만든 걸
자신이 개혁하느라고 자신이 세운 걸 자신이
청산하느라고"
71페이지 <봄날에 꽃을 들고>에서는
"쫓기는 짐승 같은 내 심장을 만져보네"를 보고
저도 쫓기는 내 심장을 만져보게 됩니다.
75페이지 <감각의 기억>이라는 시.
"산에서 내려와 풀을 뜯던 고라니가
집으로 돌아가다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던
그 뛰는 가슴 같았을 것."
이 싯구를 보고 저도 그냥
시를 써버렸던 거 아닙니까.
101페이지 <광장이 사라졌다>에서는
에릭 호퍼의 [영혼의 연금술]을
부록으로 만나게 됩니다.
"힘있는 자가 약자를 모방한다는 거"
그 괘씸함에 잠시 분노를 하기도 합니다.
시가 참 좋습니다. 시집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이 리뷰를 하기 전에 최소 두 번은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을 지하철에서도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었습니다. 문학은 어쩌고, 시는 어쩌고의 오만한 지식과 상관 없이 시인의 아픔, 절규를 온몸으로 느끼며 읽었습니다. 이 시집, 서너 번은 더 읽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