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읽은 32권의 책
따뜻해서 영원히 춥지 않을 것 같더니, 트리도 설치하고 산타도 집 앞을 밝히는 겨울이 왔다. 일터에서, 도서관에서, 여행지에서도 책을 읽지만, 나의 노란 방 침대 위에서 대부분의 책을 읽는다.
미리 온수매트를 켜두어 데워진 이불속에 쏙 들어간다. 초등학생 때부터 썼지만 아직도 나의 것인 스탠드를 켜고 잡아 늘린 후에 읽기 편한 각도로 불을 비춘다. 베개를 두 개 겹쳐서 베고 옆으로 누워 쌓아 둔 여러 책들 중 하나를 편다. 내키는 대로 집어 들기도 하고, 꽂혀서 한 권을 쭉 읽기도 혹은 십여 권의 책을 뷔페처럼 조금씩 동시에 읽기도 한다. 같은 자세로 문득 뻐근해지면 반대로 뒤집었다가 기대앉아 읽기도 한다.
글자를 읽을 줄 알았던 때부터 아주아주 오래된 나의 습관이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렇게 지낼 것 같다. 일상을 지켜준 튼튼한 글자들과 함께한 지난가을의 기록들을 여기에 적어둔다. 마음속에 찬 바람이 불어 쓸쓸할 어느 날의 나에게도 보탬이 되길.
아마존 분홍돌고래를 만나다 _사이 몽고메리
강릉의 고래 책방에서 산 돌고래 책. 특별한 가을의 기념품이다. 글을 잘 쓰는 생태학자는 이처럼 매력적이다. 흡입력이 매우 좋다. 시작하면 끊을 수 없는 글솜씨의 책이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제목 그대로 아마존에 분홍 돌고래를 만나러 떠나는 탐험에 대한 내용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전설 속 환각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많은 경험, 자연을 오케스트라에 빗댄 아름다운 비유, 그 모든 걸 기록으로 남긴 성실함까지. 저자의 지난 시간들이 부럽다.
보투라고 불리는 분홍 돌고래 떼에 에워싸인 감격적이고 진귀한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염원하던 돌고래 떼를 만나 결국엔 그들의 영역에서 함께 수영한다. 꿈만 같은 일일테다.
책을 읽으며 아마존에 있다는 오페라 하우스와 제돌이에 대해 검색해 보게 되었다. 못된 인류의 한 일원으로서, 건강하게 제주 바다에 살고 있다는 제돌이의 행복을 빈다. 다른 돌고래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지길.
그림을 그리러 오는 초등학생 친구 중 한 명이 해양 생물을 줄줄 꿰고 있어서 함께 돌고래를 그리며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기억들로 또 하루의 겹을 쌓아나간다.
오늘도 나무에 오릅니다 _마거릿 D. 로우먼
꽤 오랫동안 생태 분야의 매력에 빠져 관련된 책들을 읽고 있는데 그중 한 권이다. 믿고 보는 여성 전문인들의 책! 역시 너무 좋았다.
숲 우듬지라는 나무의 윗부분에 사는 곤충을 공부하는 생물학자가 썼다. 로프, 열기구, 크레인 등으로 나무의 윗부분을 관찰한다. 호주의 오두막에서 보낸 거친 시간이 있었기에 만날 수 있는 현장의 시간들이 귀하다. 아이들과 함께 탐사를 하는 모습이 멋짐 잡채!
여성 과학자들의 끈기 지혜를 언제나 존경한다. 언젠가 한 번 읽었던 이 분야의 책들을 정리해 둬야겠단 다짐을 했다.
야옹이 수영교실 _신현경, 노예지
그림을 그리러 오는 초등학생 중 함께 수영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있는데, 내가 생각난다며 가져왔다. 그 마음부터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못지않게 그림도 내용도 귀엽다.
고양이 마을에 수영장이 생기고, 물을 무서워하던 고양이들도 극복해서 생존 수영을 다 함께 배우게 된다.
남은 올해에는 무서웠던 한 가지를 극복해 보는 도전을 즐겨야겠다 생각해서 재봉을 시작했다! 미루기만 했던 다짐을 실행시켜 준 멋진 이야기.
빨간 머리 앤 전집 6권 _루시모드 몽고메리
지난 계절 마음을 채워주었던 앤. 그 뒤의 이야기를 읽었다. 앤 전집도 n번째 정주행 중인데, 딱 5권 꿈의 집 그 후의 이야기에는 잘 손이 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앤의 분위기는 학교를 다니는 부분인가 보다.
앤처럼 옷을 만들어 입고 싶어 재봉을 배우고 있다. 아직은 작은 소품 위주지만 언젠가 꼭! 앤이 입는 원피스를 만들어 입을 테다.
토지 3-12권 _박경리
오랜 꿈인 토지 완독하기. 드디어 해내다! 비록 그림도 있고 내용도 편집된 청소년 판이지만, 전집을 다 읽게 되었다. 앉은자리에서 네 권씩 끊어 읽을 때도 있을 정도로 며칠 만에 완주하게 된 흡입력. 토지의 매력은 맛깔난 대사. 그리고 역사를 관통하는 등장인물들의 입체감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궁금한 건 서희네 가족 이야기인데 뒤로 갈수록 다른 인물들의 비중이 커져서 아쉬웠다. (앤에서도 앤과 길버트가 궁금한데 다른 사람 이야기만 오천 번 등장한다)
길상의 그림으로 위로받는 병수
일본인 오가다와 인실의 사랑
제일 싫어! 용이와 두 여자들이 얽힌 가족 이야기
심금녀의 불행한 삶
등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내용들은 여러 방면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사랑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나 싶다.
처음 도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스토리라인 하나를 잡아 본다 생각하고 읽으면 좋겠다. sbs에서 한 김현주, 유준상 배우 버전의 토지를 보고 싶은데 sbs 어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어 아직 아껴두는 중이다. 꼭! 드라마로도 정주행 해봐야지.
보통 일베들의 시대 _김학준
인터넷에서만 사용되는 날 것의 단어들의 향연에 머리가 아플 정도다. ‘차가운 열광’이라 부르는 냉소의 부족함에 대해 썼다. 혐오의 시대를 분석한 글이기에,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논문에 가깝다. 어찌 이걸 주제로 삼았는지… 대단하다, 한 번 자세히 물어보고 싶다. 어디서 오셨기에 여기까지 흘러오셨나요.
인터넷을 들끓게 했던 뜨거운 주제들은 여기 다 있다. 현세대가 왜 어쩌다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냉철한 시선을 원한다면 추천한다.
촉진하는 밤 _김소연
좋아하는 시인의 신작. 김진영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어쩐지 정리가 많이 된 분위기에 쭈뼛거리게 되었는데 2부부터 정신없이 좋았다. 읽으며 i에게 시집을 다시 들춰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2층 관객 라운지-로 연결되는 두 시, 접시에 누운 사람, 칠월, 천사의 날개도 가까이에서 보면 우악스러운 뼈가 강인하게 골격을 만들고, 꽃을 두고 오기, 디버깅이 좋았다. 계속 계속 새롭게 써주세요. 한 낱 새우젓의 마음!
도시의 밤하늘: 빌딩 사이로 보이는 별빛을 찾아서 _김성환
자주 가는 도서관의 추천 도서라 읽게 되었다. 천문대까지 가지 않아도 도시에서 별자리를 찾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친절하고 유용하게 설명했다. 계절에 따라 혹은 건물들에 가렸을 때와 같은 상황을 들어 풀어준다.
오랜만에 집에 오게 되는 밤이면, 꼭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별이 콕콕 많은 밤하늘을 보면 아, 집에 왔구나 싶다. 이 책이 있다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겠다. 그럼 지붕 모양으로 잘린 익숙한 밤하늘이 더더 좋아지겠지?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 _트린 주안 투안
지금 보니 작가의 이름이 멋지다! 언제나 늘 궁금한 천문학.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밤하늘을 로스코, 모네, 루소의 그림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적 내용도 매우 많아 문과인은 조금은 어지러웠다.
숨 쉬는 무덤 _김언
데뷔작이라니! 예전의 시집이 복간되어 나온 책이다. 문지에서 나온 <모두가 움직인다>가 더 좋았다. 코로나를 겪은 후의 시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쓰려나? 찾아보니 있기에 한 번 읽어보기로 한다.
당신과 내가 간편한 사이라서
헤어져도 좋은 간편한 사이라서 _자두나무 당신 中
책을 덮고서, 말들, 몰라도 되는 것들이 좋았다.
(읽으면서 든 의문. 페이지 밑에 0은 무슨 뜻이지?)
엘리's 테이블 _엘리, 헨케
여자가 그리고 남자가 요리한 부부의 스웨덴 요리책.
요리에 얽힌 짧은 이야기들이 귀엽고 그림도 귀여워!
블루베리를 꿰어먹는 것도 귀여워!
일본가정식 260 _김하경
할 줄 아는 요리 레퍼토리가 떨어져 가는 참에 도서관에서 빌려 보게 되었다.
친근한 요리들이 등장한다. 간장 베이스 조림요리가 많이 나온다. 이 책을 보고 돼지고기를 생강과 함께 조려먹었다. 나는 곤약도 좋아하니까 곤약 추가!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_나카무라 요시후미
시골마을에서 가마가 있는 빵집 주인이 건축가에게 리모델링을 의뢰한다. 소통을 하며 집주인과 건축가가 집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역시 중요한 건 은행 대출이야…
선재 스님의 이야기로 버무린 사찰음식 _선재 스님
생로병사의 음식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적 이야기가 많지만 종교보다는 먹는 것이 곧 몸이고 정신의 건강이다라는 시점으로 읽으면 충분하다. 과정 속에서 이해를 기다려주기에, 불교는 언제나 울림을 준다. 스님의 다른 책인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또한 읽어보고 싶다.
날마다 설레는 텃밭 만들기 _다케무라 히사오, 하시모토 요코
초보자 아이들을 위해 텃밭을 만드는 방법을 그림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다. 아기자기한 그림이 정말! 너무 귀엽고 내용 또한 유익하다. 농사 쫌 지어봤다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춥고 더운 우리 집 _공선옥
가난하고 슬픈 유년시절, 습하고 추웠던 집에 대한 이야기. 너무도 생생하여 내가 그 집들의 창문 안을 들여다보는 바람이 된 것 같다. 마음 가운데가 그 유리 모양으로 뚫려 숭숭 외로움이 통한다.
베토벤 불굴의 힘 _필리프 A. 오텍시에
손꼽아 기다려온 임윤찬의 공연을 앞두고 베토벤을 급하게 예습한다. (세종에서 하는 뮌헨필 티켓 잡았어요 야호!)그러기에 가장 편리한, 아무튼 시리즈의 원조격인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부터 시작!
베토벤은 엄격한 부모님의 가업을 이은 자식이다. 잡무에 매우 시달렸고, 조카에게 집착했으며 매우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오전부터 점심 먹기 전까지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모차르트 키즈였구나! 어떤 식으로는 과하고 한편으로 모자란 가족이 있었기에 짝사랑에 중독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기에 또 불멸의 곡들이 나왔겠지.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_임현정
새롭게도 학자가 아닌 연주자의 입장에서 베토벤을 이야기한다. 신선한 접근! 어린 시절 유학을 떠난 저자는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외로움 속에 있었으나 베토벤이 등대가 되어주었다.
레슨과 연주로 돈을 벌고, 곡팔이 비즈니스에 또한 능했던 베토벤의 삶에 대한 부분, 곡적인 해석, 연주자로서의 감상과 더불어 본인이 연주한 음악이 큐알로 첨부되어 있다. 멋지죠?
난처한 클래식 수업 2: 베토벤, 불멸의 환희 _민은기
모차르트 때만 해도 피디나 플레이어로서의 음악가들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기에, 베토벤은 거장이자 위인이 되었다. 훗날 연주되리라 생각하며 작곡한 것이 새로운 관점이었다는 걸 보니 역시 바꾸는 자가 역사에 남는다.
젊은 시절 서바이벌 연주자로 성장했으며, 후원자와 애증의 관계였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최신 악기인 피아노 협찬을 ppl 같은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해서 좋았다. 쉽게 푼 내용과 풍부한 그림, 요약이 중간중간 있어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베토벤 좀 친해졌네! 느끼겠다. 진짜 수업이 있다면 강의로도 들어보고 싶다.
한번 더 피아노 앞으로 _스티븐 허프
제목부터 너무 좋다. 세계를 누비는 피아니스트가 연주 투어를 다니는 중간중간 써놓은 글들을 묶어냈다. 월트 투어를 다니는 가수들도 곡을 쓰기 위해 노트북과 피아노, 장비들을 들고 다니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피아노도 어릴 때부터 커서까지 늘 도전해 왔지만 어쩐지 너무 수학 같아 콩나물들만 떠듬거리나 괴로운 나의 소리 대신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경지에 다다른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성실함과 자신만의 시선이 있다. 그걸 책으로 볼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 영어 책 읽기 또한 계속되고 있다. 올해 안에 다 읽기로 다짐한 해리포터 시리즈가 끝이 보인다. 가을 동안에는 혼혈왕자 페이퍼북 영국판을 스프링 제본한 2권과 죽음의 성물 1권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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