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조각
bgm 서로의조각(With 박주원 Acoustic ver)_프롬(Fromm)
나는 엠마이기도 아델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하루 종일 그 숨소리와 눈빛이 떠오르고 수백 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거리지만,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적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눈물이 터져버릴 정도로 지독한 이별 중에도, 아델의 일상은 계속되듯이, 이 영화가 내리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굳건한 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나를 깨우는 발차기가 와도, 쉽게 변하지 않는 일상의 관성이 지겨워졌다. 그 끈질긴 반복을 끊어내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이 사실은 미치도록 지겨워질 정도였다. 사실 무엇을 할 수 있냐마는.
무엇과 무엇을 한다는 생각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괴롭혔다. 타일 사이를 메우는 매질처럼 (그곳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곰팡이가 핀다) 나의 일상이 꾸역꾸역 아델과 엠마로 메워졌다.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다시 앞장을 펴 들게 되는 소설이 있다. 이 영화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떠올릴 만큼 큰 부피로 나의 일상에 스며들었지만, 차마 다시 볼 수 없었다. 이들에게 휘둘렸던 지난 두 달간, 애처롭게 이 영화를 잊길 바랐지만, 또 잊고 싶지 않았다. 마치 어떤 아픔이 와도 무던하게 넘길 단단한 마음을 원하면서도, 생생하게 살아내길 바라듯이 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이 3시간에 다다른다. 알고 봤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양이 발걸음 소리도 들려올듯하게 조용한 이곳에서는 밤이면 불 한 자락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어둠 속에서 노란 불을 켜고 이 영화를 보았다. 처음에는 지루함에 몸을 뒤틀고 술을 홀짝거렸지만, 나중에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자체를 잊어버릴 만큼, 흡입력 있었다. 그 흔한 음악도, 거창한 그래픽도 없이, 나를 가장 현실적인 환상 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는 엉엉 울고 싶었다. 달래줄 사람도 있었지만, 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혼자였다면 울어버렸을 텐데. 나는 원래 울음 끝이 기니까, 그만큼 오래 이 영화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날아가는 생각들을 되짚어 적어보기로 했다.
차마 다시 볼 수 없었고,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영화에서 느껴진 어떠한 간극들로 추정된다. 스물다섯의 나에게 느껴지는 온갖 간극들을 3시간 안에 압축했기 때문이다.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던 빨간 버스 안에서, 매주 겪어야 했던 간절기 같은 시간들. 크레바스처럼 날 가르는 중앙선을 길게 바라보며 벌어지고 있는 간극을 느껴야 했던 그 순간의 기분이 떠오른다. 분명 기쁘고 따뜻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울음이 날 것 같았던 기분. 생각을 하느냐고,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느냐고, 말을 시작하지 못할 때가 많은 나니까. 했던 말을, 들었던 말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하는 나니까. 그래서 겪어야 하는 간극들이었고, 그래서 엠마, 아델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엠마로 살고 싶은, 아델이기도 한, 그 간극을 재며 걷고 뛰는 나에게 바치는 이야기라고, 감히 생각하고 싶다.
이 영화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아델을 이야기한다. 큰 눈과 새의 부리 같은 입술을 가진 여배우의 이름 또한, 아델이다. 영어로 번역되기 전, 영화의 제목은 ‘아델의 일생 1장과 2장’이라고 한다.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따뜻하다는 파란 머리를 한 사람은 언제 나오나, 한참을 기다렸다. 체감 상 이야기의 삼분의 일이 넘어갈 때쯤, 스치듯 등장한다. 파란 머리의 엠마가 아델의 삶에 엮여 들어오기 시작하며, 이전과 대비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엠마에게 물들어가는, 아델의 일생 2장이 시작된다. 이 사랑은 이전에 만났던 남자와 나눴던 것과는 달랐다. 척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방은 나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사랑이다.
두 사람은 알다시피, 여자이고, 이 영화는 어쨌든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이 복잡한 세상, 어느 단면을 잘라도 수 만개의 색깔이 드러날 세상의 속살인데, 하물며 사람의 사랑 또한 다양하고 복잡하단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실 이성애자인 나의 모습 또한 자로 그어진 세상에 맞추어 자라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사회적 시선에 대해 깊게 다루지 않고 있다. 초반에 둘의 데이트 장면을 본 친구의 비난 정도뿐이다, 원작은 사회적 고민에 대한 비중이 훨씬 크다고 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그냥 사랑만 이야기하기에도 러닝타임이 부족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는 우선순위에 있지도 않고 서로에게 정신없이 물들었던, 온전한 사랑 이야기여서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럼 이 영화는 사랑 영화일까? 여기에서도 많은 간극들이 이빨을 드러낸다. 엠마는 그림을 그리는 미대생이고, 아델은 유치원 교사가 꿈인 학생이다. 이혼한 아버지의 그림이 걸린 집에서, 엄마와 엄마의 남자 친구와, 엠마와 딸의 여자 친구가 식사를 한다. 좋아하는 와인을 음미하고 굴을 먹는다. 그리고 꿈에 대해 묻는다. 아델의 집은 스파게티를 먹으며 조용히 텔레비전을 본다. 엠마는 삶을 향유하는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아델은 딸의 취직을 걱정하는 너무도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엠마와 만난 이후, 아델은 자신이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함께 동성애자를 위한 시위에, 노동법에 관한 시위에 참가한다. 엠마는 아델을 뮤즈로 한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고,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엠마는 아델에게 계속 글을 써보라고, 너의 무언가를 표현해보라고, 실존주의적 인간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델은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갓 알았을 뿐이다. 두 사람의 걸음은 시작점이 달랐던 만큼, 속도도 달랐다.
주어진 삶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아델을 지루해하며 엠마는 자신의 삶에 몰두한다. 파랗던 머리는 어느새 다른 색이 되었고, 아델은 외롭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로 나아가는 엠마를 지켜봐야 하는 아델은 다른 남자와 만난다. 물론 바람은 언제나 정당화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엠마 또한 아델을 외롭게 했고, 지치게 했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엠마에게는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중요하고, 그런 삶을 권장하는 환경에서 자라왔다. 엠마는 아델을 위해 자신의 일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포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래 왔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만큼만 좋아했던 걸까.
하지만 아델을 뮤즈로 드러내고 가족에게도 소개한 엠마다. 자신을 철학 선생님으로 숨기고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아델의 엄마는 회화작가는 먹고살기 힘들지 않으냐고 묻는다. 부자 남자 친구가 있고, 그래픽 쪽을 하면 된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스스로를 부정하며 벽장 안으로 숨으려는 아델의 모습에 맞추어주고, 감싸준 엠마인데, 정말 그만큼만 좋아했던 것일까.
바람을 들키고 마지막으로 싸우던 때, 서늘한 엠마의 눈빛은 언제 떠올려도 칼로 베이는 듯 아프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듯했던, 사랑을 말하던 그 눈인데, 이미 끝난 마음이 비치는 눈빛이다. 지난 시간들은 속절없이 난자당하고 콧물 풍선이 나오도록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다. 모든 게 다 거짓말처럼.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 테지만, 정말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따듯했던 사랑이 예견된 이별처럼 허무하게 끝나버린 게, 그 사실들에 서글퍼진다. 서로가 걸어 나와 손이 닿는 중간 지점은 애초에 없었고, 그저 공놀이만 할 수 있었던 걸까.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각자의 홀로서기를 돕는 사랑(이동진_라라랜드 감상평)일 수밖에 없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곱씹으며 연신 클로즈업되었던 두 사람의 얼굴처럼 두 사람의 마음 또한 사무치게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고. 한껏 꾸미고 엠마의 전시회에 간 아델은 엠마와 여자 친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엠마의 그림엔 더 이상 내가 없음을 확인사살받는다. 알지 않는가, 알면서도 확인받아야 끝나는 마음이 있다. 전시장을 나와 푸른 원피스를 입고 걸어가는 아델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첫사랑을 앓아낸 아델은 이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좋아하는 음식을 다 먹어버린 빈 접시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허했다. 영화를 다시 볼 용기는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기사와 인터뷰들을 찾아보았다. 2013년, 칸 영화제는 만장일치로 이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하며, 이례적으로, 감독의 이름뿐 아니라 영화를 이끌어간 두 배우의 이름도 호명했다. 영화관이 아니면 영화를 끝까지 보기 어려워하는 나를 기어이 끝 화면까지 보게 한 힘이 바로, 맨 얼굴의 레아 세이두와 아델 에그자르코폴로스가 뿜어내는 연기이다. 혀를 부드럽게 쓸어야 나는 발음들로 홀린 듯이 듣게 되었던 불어 또한 달큼한 양념이었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둘 다 구사하는 두 배우 덕분에 영어로 진행된 몇 개의 인터뷰를 더듬더듬 들으며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처음 횡단보도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는 장면은 한 컷을 100번 이상씩 촬영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연기를 하는 것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끈질겼고, 모든 촬영이 그런 식이였다고 한다. 실제 찍은 씬의 10퍼센트도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폭력적이기까지 했다는 감독의 촬영 방식 때문에 스텝들이 노동법 위반 서명을 칸 영화제에 내기도 했다고 한다. 쓸데없이 길었던 정사신에서 보인 집요함이 그 흔적일 것이다.
영화 밖의 현실은 그러하나, 다시 작품 속으로 들어와 보자면 어쨌든, 만약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다른 심심한 영화를 100편 봐야 했다 해도, 기꺼이 다시 그러할, 그런 영화이다. 당분간 하루의 틈새를 가로지르는 이 영화의 느낌들을 밀어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당분간 지금의 느낌을 망치기라도 할까, 재생 버튼을 누를 수 없을 것이다. 푸른 바다에 몸을 맡겼던 아델처럼, 나도 이 영화에 그저 생각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이 영화에 OST가 있었다면, 이 노래였을 것이다, 생각했던 서로의 조각을 들으며 뒤섞인 감상문을 끝내려고 한다.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돼버린다. 그런 풍경을 다시 보게 될 때, 우리 몸의 일부가 갑자기 격렬히 반응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_김영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교통사고처럼 부닥쳐온 이 영화는, 나의 무릎 정도를 차지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나를 물들이는 것, 물들어가는 나, 내 사랑의 색깔, 링에서 내려온 사람, 내 안의 어린 예술가. 문득 놀랄 정도로 쏟아지는 많은 질문과 생생한 감각을 남긴 채로 오랜 시간 나를 허덕이게 해 준 이 영화에게 감사하며. 언제나 그렇듯,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고,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그때에, 남겨둔 말들을 다시 생각하기로 한다.
하지만 너에겐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