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들 seondeul Sep 19. 2017

8개의 일기

보홀 여행기



9월. 11일.     


환절기에 거쳐야 하는 것들이 있다. 시골 약국에서 지어주는 약은 봉지가 빵빵할 만큼 양이 많다. 약 먹고 운전하지 마세요가 인사의 마침표인 약국에서 지어온 약을 먹었다. 하루 뻘뻘 땀을 흘리며 자고 일어났더니 가뿐하다.      


코감기까지도 기꺼이 참게 하는, 사랑하는 계절 가을이다. 도저히 방 안에 있을 수 없어 캠핑의자에 몸을 기대고 벤치에 다리를 얹었다. 햇살로 금이 그어진 자리에서, 청량한 그늘을 만끽하고 있다. 고양이들도 앞발을 배고 잠을 청하는 조용함을 배경으로, 나는 아른아른한 며칠 전들의 풍경을 떠올린다.           



                

2017년. 7월.     


이모와 엄마의 부추김을 불쏘시개로 해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친척동생과 정말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사실 동생의 번호가 이미 있는 줄도 몰랐다. 떠올려보면, 동생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동생이 미국에 있을 때, 잠깐 같이 살기도 했고, 학교도 같이 다녔었다. 우리 가족의 첫 일본 여행에도 함께했으며, 우리 집에서 두세 번 방학을 보내기도 했다.      


9살이던 나와 8살이던 동생은 눈만 뜨면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기다란 스펀지에 의지해서 오리발을 끼고 둥둥 떠다녔던 기억이 난다. 아마 전지훈련 간 수영선수만큼의 운동량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억지로 발라준 선크림을 수영장에서 몰래 씻어내며 새카맣게 타버린 나의 모습만이 사진 속에 남겨져 있다.      


그때를 생각하며 여행지를 바다로 골랐다. 때마침 섬과 바다로 여행을 다녀온 책을 두어 권 읽은 탓도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고, 발을 담그고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 작은 바닷가 마을에 대한 나의 환상도 한몫했다. 이번에도 그 기대를 스치듯 읽어본 낯선 이름에 걸어보기로 했다. 나라를 정하고 몇 개를 비교해본 끝에 한 패키지를 골랐다. 몇 년 만에 만난 동생과 뜨거운 볕 아래 길을 찾다 지치고 싶지 않았다. 중학생 때 가족여행 이후로 첫 패키지였다. 원래 같았으면 비행기 시간을 체크하고 공항에서 숙소 가는 길을 미리 알아보느냐고 머리가 아팠을 텐데, 이렇게 편할 수가. 카톡으로 인사를 나눈 후에 여행을 잊고 지냈다.                               




2017년. 8월.     


동생도 나도 여행을 잊었다. 동생의 무심함이 여전해서 웃음이 나왔다. 언제 출발하는지는 알고 있을까? 언제나 덤덤하고 잘 기억 못 하던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동생은 외동인 나에게 언니의 역할을 알려준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한 명은 내 의동생 윤정이. 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잘 지내고 있단 소식을 들었다. 훌훌 털고 어디서나 꼭 행복했으면. 보고 싶네.                           




9월. 2일.     


새벽 비행기를 타기 버거울 것 같아 이모부가 지내는 일산의 집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은 여전히 어설프고 느릿느릿했으며, 오랜만에 보는 이모부도 여전히 장대같이 마르셨고, 늘어나는 말끝도 그대로였다. 집은 짐이 상상 이상으로 많고, 이런 걸 무던해하는 나에게도 지저분했다. 동생의 어릴 적 사진이 곳곳에 있고, 평전, 전쟁학 같이 평생 내가 손대지 않을 것만 같은 책들이 고가구 위에 잔뜩 쌓여있었다. 모든 짐은 빼곡했고, 뽀얀 먼지가 있었다. 근데 뭔가 모르게 아늑했다. 와본 적도 없지만, 알고 잊고 있었던 것들 중에 이렇게 시간 속에서 멈춰져 있는 곳이 한 군데쯤은 남아준 느낌이었다. 동생이랑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하다가 잠에 들었다.                          




9월. 3일.     


언제 와도 설레는 공항. 일하는 동안 몇 번 와봤다고 덜 낯가리게 되었다. 그만큼의 설렘도 사라졌겠지. 익숙함이란 그런 거니까. 비행기를 타서 얇고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잠에 들었다.  내리니 긴팔이 원망스러운 날씨였다. 4명으로 출발하는 패키지인 걸 그때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한식당에서 눌어붙은 불고기를 먹었다. 나와 동생은 무엇을 주든 깨끗하게 잘 먹었다.      


리조트가 너무 좋았다. 빨리 수영복을 갈아입고 신나게 수영을 했다. 장난을 많이 쳤다. 동생은 까르르 잘 웃었다. 맥주를 먹을 줄 아는 동생이 어색하고 신기하고 기특했다. 가운을 입고 맥주를 나눠 마시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덮었다. 젖은 머리를 베개 위로 널어놓고 잠에 들었다.           




               

9월. 4일.     


간신히 깨서 조식을 먹고 바다에 갔다. 이날 하루, 나와 동생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이 무슨 호사냐. 파라솔 아래서 졸린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맥주를 마시다가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 쇠똥구리가 되어 우리의 기념 케이크도 만들었다. 바다와 수영장을 왔다 거리고 맥주, 칵테일, 와인을 들이켰다. 수영을 못해서 물에 둥둥 떠다니다가 금방 나와 책을 읽었고, 동생은 물에 떠서 쉬었다. 그 와중에 가져온 책 두 권을 읽었다. 사두고 손이 안 가서 커버도 벗기지 않은 책이었는데, 어려운 단어가 많고 읽히지 않은 책이야 말로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딱 이었다.      


실컷 쉬고 실컷 이야기했다. 나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고 새삼 느꼈다. 계속 묻고 들었다. 바닷가 파라솔 아래서, 침대에 누워서, 각자의 끊어졌던 시간들이 조금씩 연결되었다. 최근에 보내온 시간보다 과거의 시간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이야기들이 많이 낯설었다. 사실은 동생이 접영으로 메달을 땄었고, 동방신기를 좋아했었으며, 외국에서 보냈던 시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간격을 실감하게 했다. 우리는 많이 변했지만, 또 여전하기도 했다.             


             

그날 오후.     


패키지여행에서 가장 걱정되었던 점은 가이드의 옵션 요구다. 이후에도 종종 일하는 가이드와 지나가는 손님이라는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마다,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며 참을 수 없게 불편해졌다. 사실 세상 모든 돈벌이는 그러한 것임을.      


가이드에겐 아쉽게도, 한 푼도 더 쓰지 않겠다는 의지로 경계의 눈빛을 사리지 않았던 엄마와 아들 팀 그리고 우리뿐이었다. 나란히 앉아 가격표가 적힌 리스트를 보았다. 친척동생은 해맑고 조근조근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반딧불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저녁을 먹은 후, 근교로 차를 타고 나갔다.      


사실 반딧불을 본다는 것에 시큰둥했다. 닳고 닳은 여행자 인양, 몇 개 떠다닐 반딧불을 보며 억지로 오버할 가이드의 목소리가 벌써 귀에 쟁쟁거렸지만, 그러기엔 동생이 너무도 순수하게 기대했다. 때때로 동생이 지닌 순수함의 농도가 헷갈렸으나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싶었다. 우린 서로 많이 바뀌었고,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래동화에서 창 포지에 기꺼이 갇혀주었던 반딧불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슬며시 기대감이 차올랐다. 한 톨의 기대와 들뜬 기분을 애써 시큰둥한 척해서 몰아내고 싶었다. 동생은 만약 실망스럽다면 잡고 있는 손을 꾹 쥐자고 했다. 너무도 조용해서 크게 웃을 수 없었지만 잇새로 푸웁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수납했다.       


빨대가 꽂힌 코코넛만 간이 테이블에 무심하게 있었고, 빨대를 물고 앉아 두리번거렸다. 벌레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동생이 챙겨 온 벌레퇴치 로션을 팔다리와 목에 듬뿍 발랐다. 이내 우리 둘과 가이드, 그리고 가이드의 남자 친구로 추정되는 현지인과 사공으로 보이는 몇 사람들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조용히 웃을 줄 아는 사람들은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뾰족한 배 끝에서 맨발로 균형을 잡았다. 점점 더 빛이 없는 곳으로 배는 향했다. 어두운 물감을 쭉 그어낸 강가는 필름 통에서 쭉 뽑히던 긴 필름 같았다. 짙은 강의 풍경이 계속되었다.      


반딧불은 좋아하는 나무에만 사는데, 그 나무조차 조금이라도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면 떠난다고 했다. 까탈스럽군. 달빛만 서늘하고 겨우 강과 강이 아닌 곳의 경계만 보이는데, 사공은 잘도 길을 찾았다. 이곳이 첫 번째 장소라고 했고, 나와 동생은 손을 꽉 잡았다. 덤불이라고 봐도 무방할 작은 나무에 소금 같은 빛들이 보였다. 시력이 조금 더 안 좋았다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상상했던 풍경은 라푼젤의 등불이었으나 남겨두었던 덤덤함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는 금방 돌려져 한참을 검은 강을 따라갔다.      


마지막 장소라고 했다. 멀리 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작은 빛을 금방 발견했다. 텔레비전이 지지직거리는 것만 같았다. 바로 보이지 않는 홀로그램 같았다. 그 나무 한 그루만 빼곡한 빛을 두르고 있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었다. 빛들은 옆에서 옆으로 옮겨가며 파도쳤다. 이러한 장면 앞에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배의 시동이 꺼졌다. 지붕에 찔러두었던 노를 저어 나무 가까이로 다가갔다. 작게 첨벙이는 소리와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까이에 있었다. 이내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반짝이는 동심을 기대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진지해졌다. 희미한 반딧불들은 강가 너머로 번뜩이던 자동차 불빛들에 한입에 삼켜질 것 같았다. 무언가를 떠올리기거나 소원을 빌기에 빛은 아주 미약했다. 오가는 생각들도 그랬다. 반딧불은 달빛보다는 강했고, 그래도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광이 어딘가에는 꼭 필요하겠지. 마침 그 전날 바닷가에서 읽은 졸린 책에 반딧불이 나온 탓에 그 내용도 스쳐갔다. 반딧불이가 되고 싶은 것인지, 반딧불이가 사는 나무가 되고 싶은 것인지, 얕은 생각들도 마냥 넘실거렸다.      


배에 있는 나무 울타리에 턱을 괴고 한참 동안 몽롱하게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맨발로 뾰쪽한 모서리에 앉아 수십 번도 더 보았을 풍경을 처음처럼 같이 바라봐주는 그 배려가 고마웠다. 이내 멀리서 사투리 섞인 한국말이 들려왔고, 우리는 배를 돌렸다. 시원한 강바람은 듬뿍 모기약을 발라둔 끈적한 살을 스쳤다. 그곳의 평화는 아무 곳에나 있던 들개들의 순한 눈망울을 닮았다. 그리고 게임처럼 미친 듯이 역주행하는 차를 타고, 손을 꼭 잡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빨려 들어가듯 잠에 들었다.      



                    

9월. 5일.     


나는 수영도 못하거니와 숨을 참고 세수를 할 만큼 물을 무서워한다. 물에 빠질 뻔한 적도 없는데 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워터파크에 가서 남들 다 탄다는 파도풀에 두어 번 쓸려가 안전요원이 건져줘서 운 적도 있고(어릴 때 아님, 무려 얼마 전 일), 푸껫에서 스노클링을 하러 갔을 때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며 울었다(이것도 작년). 가이드는 필리핀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이빙 포인트가 가장 많은 곳이고, 특히 보홀은 다이버들이 꿈꾸는 최고의 바다라고 했다. 이런 곳에서 다이빙을 하지 않는다면, 보홀을 헛 다녀간 것이라고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살랑바람에 홀딱 넘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의 배에서 다이빙 교육을 받고 있었다.       


늘 그랬듯, 무슨 자신감인지 다이빙 정도는 거뜬하게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텔레비전에서 많이 봤고, 나는 스노클링도 해본 사람이다. 상상으로는 이미 산호초랑 하트하고 물고기랑 인사 중이었다. 스케이트를 타러 가기 전에도 비슷한 증상이 발현됐었다. 나는 이미 김연아고, 슝슝 타다가 당연히 스핀 정도는 흉내 내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얼음에 발을 디딘 순간, 사람들은 도대체 뭘 믿고 이 가느딩딩한 칼날에 의지하고 있는 건지, 칼날에 손이 썰릴 줄도 모르는 채로 저렇게 해맑게 타는 건지, 모든 걱정이 얼음판에 펼쳐졌고, 물론 신체 또한 충실하게 말을 듣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관절들이 후들거렸다.      

몇 번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역시 상상은 잘 오작동되었고, 근거 없는 자신감은 또 차올랐다. 대부분 이 자신감의 일부는 실현되는 편이나, 신체를 활용해야 하는 이런 사건 앞에서는 속절없이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 산소통을 매고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들 차례였다. 꾸물꾸물 물개 같은 옷을 입은 채였고, 이미 다른 사람들은 물속에 있었다. 눈에 띄게 긴장하는 나에게 현지인 두 명이 붙었다. 설명을 들을 때까지 만해도 오 이퀼라이징? 잘되네, 좋았어, 별거 아니네, 이런 생각뿐이었는데, 일단 발이 닿지 않고 물이 눈앞에서 찰방대는 순간 나의 상상력이 또 작동되었다. 순식간에 바닷속에서 호흡기가 고장 나서 고통스럽게 물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이 번뜩였다. 이내 기절한 채로 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나도 물속의 시점으로 잘 상영되었다. 물안경은 괜히 헐거운 것 같았다. 강사는 알 유 오케이, 널버스? 등을 물었으나 애써 오케이 오케이를 읊던 나는 고작 이삼 분만에 해초가 되어 배 위로 올라왔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 배에서 투명한 바다를 신나게 탐험하는 동생을 보자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실패했다. 모든 체육 활동 앞에서 무력해지는 나의 신체를 잘 알고 있는 탓에 이런 순간을 너무 많이 겪어봐서 보통은 초연했는데, 왜인지 그때만큼은 뜀틀을 뛰지 못해 창피해 죽고 싶었던 초등학생 때 다선이로 돌아갔다. 나는 루저였다.      


눈이 땡그래진 동생이 올라오고, 산호를 만진 이야기를 들었다. 눈앞에 물이 참방 거릴 때 물안경 아래로 잠깐씩 보였다 사라진 바닷속에 물고기가 별로 없었던 사실을 위안 삼으며, 배는 다른 섬으로 향했다. 나이가 들수록 굳어지는 활동범위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배에 날개처럼 나무 구조물이 있었는데, 그 끝이 깎인 모양이 태워져서 짧아지는 담배 같다고 생각하며 멍하니 물이 튀기는 모양을 보았다. 나는 느꼈다. 앞으로 평생을 다이빙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음에 닥쳐온 스노클링 또한 망망대해에 구명조끼만 입고 떠있는 것이었다. 다이빙을 실패한 나는 이것만은 해내리라는 의지에 차있었다. 사람 세네 명 당 한조가 되어 현지인이 물고기가 많은 포인트로 데려가는 식이었다. 물에 띄워놓자마자 내가 헐떡이는 것을 보자 현지인은 동생을 다른 조로 보냈다. 몇 번 입술을 태우는 바닷물을 뱉어내고 나자 스노클링을 해본 적 있어서 잘하는 커플과 내가 한 조가 되어있었다. 요주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열여섯이라고 했나, 스물이라고 했나, 나보다 더 마른 것 같은 친구가 헐떡이며 수영했다. 구명조끼를 생명 줄처럼 붙잡고 끌려 다녔다. 친구는 가끔 거북이 거북이를 외쳤고, 거북이는 바위인지 헷갈릴만하게 떡하니 있었다. 엄청 가까이를 지나가서 같이 수영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긴장이 풀리니 재밌었다. 한 번 해봤다고 다이빙 실패로 생긴 루저 자리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 와중에도 나를 끌고 다닌 친구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배 위에 올라오자 비로소 웃음이 났다. 가이드가 왜 벌써 올라오냐고 했다. 힘들면 올라오는 거라고 더 하라고 했고, 배 위에는 지친 사람들뿐이었고, 나는 아직 지치지 않았고, 다이빙을 실패했지만 스노클링은 해냈기 때문에 더 하고 싶었다. 나를 끌고 다니던 친구가 헐떡이며 배 위로 올라왔다. 힘든 건 저 친구였다. 아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하지 말까요? 하니까 가이드가 다 돈 받고 일하는 건데 뭐가요, 원래 한 명이 네 명씩 끌고 다니는 체력 좋은 친구들이에요. 더 하세요, 헤이, 어게인! 망설일 틈도 없이 이미 질러버렸다. 그 친구는 배위에 있던 동료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아,,, 오케이.... 미안해 죽을 뻔했다. 그러나 이대로 안 하면 더 후회할 것 같았다. 그 친구는 마지못해 다시 바다에 풍덩 빠졌다. 쏘리,,, 소심한 인사와 함께 나도 다시 물로 향했다. 이번엔 그냥 물에 얼굴을 담그고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펼쳐진 풍경은 예뻤고, 둥둥 매달려 실컷 보았다.      


물놀이 후에 먹는 밥은 역시 제일이다. 매번 받치는 쟁반 무늬만 다르고 같은 고기구이 메뉴였지만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그리고 낮잠을 아주아주 달게 잤다.





9월. 14일.      


지금은 그 도서관의 소파.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쓰고 싶어서 부랴부랴 노트북을 챙겨 왔다. 동생과 한 여행은 나름의 의미로 좋았다. 여태까지 내가 했던 여행들에 비하면 양념이 싱거운 편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함께할 수 있는 최적의 최대의 여행이었다. 벌어졌던 크고 작은 시간들을 이야기와, 어느새 마실 수 있게 된 맥주와, 망고, 컵라면들로 조금이나마 채워 넣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초등학교 오 학년, 동생이 사 학년일 때, 일본으로 가는 가족여행에 동생이 함께 간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은 참 오지랖 넓게도 많은 동생 언니들을 데리고 휴가를 떠났다. 그때의 몇 에피소드들은 아직도 저녁 식탁으로 소환된다. 회와 해산물이 잔뜩 있던 뷔페에서 동생이 골라온 것은 접시의 반을 차지하는 크로와상과 잼, 그리고 김밥, 같은 일. 그리고 방학 때 우리 집에서 지낼 때 매직 펌을 한 동생이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젖히고 머리를 털어내던 행동은 엄마 아빠의 단골 성대모사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잊을 수 없던 그 일본 여행 때 배를 탔는데, 옆 침대의 사람들이 4명의 사촌들이어서 엄마 아빠가 가져온 소주를 막 나눠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소연아 다선아 너네도 꼭 저렇게 나중에 같이 놀러 다니면 참 좋겠다,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 내 나이쯤 되었던 것 같다. 오랜 바람의 시작을 이제야 끊은 것 같다. 앞으로도 같이 나이 들어갈 피붙이가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혼자 자라온 나는 이런 곳에서 형제자매의 느낌을 체험한다. 또 벌어질 간격이 언젠간 또 채워질 것을 알기에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언젠간 또 다른 여행지에서 실컷 맥주를 마시며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