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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Mar 29. 2018

홍콩은 불닭볶음면

홍콩 여행기


다 제쳐두고 말하자면, 홍콩은 불닭볶음면이었다. 기대가 없었던 만큼 예상과 걱정 사이였지만, 나와 상성이 맞지 않는 도시다. 성격도 취향도 너무 달라서 영원히 친해질 일 없는 친구 같다. 나의 요소를 뽑아 긴 그래프 위에 얹어보자면, 가장 먼 반대편에 홍콩이라는 점이 생겼다. 그래서 강렬했다.     





여행의 시작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스무 살의 내일로 여행 중, 가만히 있어도 얼굴에 땀이 고이는 여름날이었다. 그때 싸우지 않고 살 길을 찾아서 굳은 여행 메이트가 된 친구들이다. 분담이 빨라 계획을 잘 짜서, 플래니라는 이름이 붙었고, 매일 먹고 자던 강의실의 호수를 붙여 플랜 305가 되었다. 이제는 만나기도 힘든 친구들과 정말 오랜만에 떠났다. 직장인의 스케줄에 맞추어 금요일 새벽 비행기를 끊었다. 야근을 끝내고 온 친구들과 공항에서 만났다. 미친 일정이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그래 왔듯, 작은 짜증도 없었다.       


짧은 이박 삼일의 일정에는 카메라가 함께했다. 그림을 그릴 시간도 없을 것 같거니와, 막연하게 느끼기를 찰칵 포착해야 뭐라도 담길 그런 속도의 도시일 것 같았다. 이건 아빠의 밥 카메라야, 다른 건 막 만져도 이건 꼭 조심해야 한다, 해서 사진관에서 놀 때도 피해 다녔던 그 카메라를 들고 떠났다. 유행에 뒤처지는 나답게 이제야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빠가 사진관을 접고 나서는, 자취방으로, 다시 집으로 장식물처럼 옮겨 다니던 그 밥 카메라를 매고 비행기에 탔다. 무거울 걸 각오했지만, 다행히 버리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름 고르고 비교했는데도, 숙소는 깨끗하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공사 중이었고, 길바닥엔 거대한 바퀴벌레가 마구 누워있었다. 홍콩이 더럽다는 걸 알고 있었고, 여행지에서는 꽤 무던해 짐에도 힘들었다. 친구가 페루에서 우박이 내리던 날 밤, 영사관 번호를 띄워 놓은 채로 머물던 임시 숙소보다 난도가 높다고 했다.      


첫날 종일 걷다가 숙소에 들어오니 홍대의 내 방이 생각났다. 지금이 몇 시건 누군가의 인기척이 끊이지 않는 곳. 밤도 밤이 아닌 이곳에 누워, 누가 돈을 줄 테니 제발 살아달라고 해도, 이를 깍 깨물며 버틸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래도 지내야 한다면 또 적응해서 살겠지. 못 살겠다 못 살겠다 하며 익숙해지면, 다른 도시가 아무 맛도 나지 않을, 불닭볶음면 같은 곳이다. 맛에 깊이나 서사가 없고, 강렬하다는 자체가 맛이 되어버린, 먹고 나면 속이 쓰리지만 주기적으로 한 그릇 때려줘야 하는.       





아직도 눈앞에 불빛과 네온사인이 아른거린다. 모든 게 빠르고 많고 대비가 높여져 있다. 에스컬레이터도 빨라 발을 올리려면 숨을 골라야 했고, 진열장 안의 샌드위치도 자리가 없다. 셔터를 빠르게 눌러도 화면에 사람이 걸렸다. 명품 가게 앞에 버려진 쓰레기도 자리가 없어 네모나게 압축되어 있었다. 고개를 한참 들어야 꼭대기가 보이는 쇼핑몰 옆에는 발을 딛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꼬질꼬질한 골목이 즐비했다.      


비행기에서 벼락치기로 읽은 책에서 홍콩은 이미지의 도시라고 했다. 실체는 사라지고 이미지가 점령한 시뮬라크르의 도시. 홍콩이 하나의 음식이라면, 얇은 쟁반 밖으로 광고들이 흘러넘칠 것이다. 내가 느낀 홍콩은 자본이 짜낸 거대한 태피스트리다. 잘 닦여 쇼윈도 안에 진열되어 있는, 이미지의 직조물.     


내용 없는 간판이 점령해 버린 도시는, 그 자체가 아이덴티티가 되어 버렸다. 벼락치기한 그 책에서 홍콩의 영화 주제가 ‘나는 누구인가, 홍콩은 어떤 곳인가’ 일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맛보기로 조금은 느꼈다. 자본으로 꿰어진 이 도시는 일국양제, 영국과 중국이 뒤섞인 임시 정거장이다. 사람들은 살고 있다기보다 머물러 있고, 골목은 완결되지 않은 채 공사 중이다.      





친구들이 휴학을 하는 사이, 나는 먼저 졸업을 했다. 요즘의 힘듦을 나누는 것도 이렇게 판이 깔려야 가능할까 말 까다. 시시콜콜하게 모든 걸 함께했던 때는 이미 지난 옛날이지만, 디자인의 최전선에서 또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해내는 모습이 기특했다. 여행 내내 각자의 방식으로 공부하는 친구들. 브랜딩을 하는 친구는 패키지를 구경했고, 놀이터를 만드는 친구는 지하철에서도 창밖의 놀이터를 보고, 의류를 하는 친구는 옷의 택에서 성분을 먼저 본다. 둘째 날 저녁, 루프 탑 바에서 야경을 봤다. 아, 아직도 퇴근 안 한 사람이 이만큼이라니. 오늘은 일요일인데. 그걸 보고 즐거워하는 게 미안했다.           


모든 시골 사는 사람이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 살면서 무언가를 새로 사지 않은지가 꽤 오래됐다. 별로 사는 것도 없는 데 택배가 끊이지 않던 걸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소비가 줄어든 게 신기하다. 매일 화장을 할 때는 다 떨어져서 새로 사기 바빴는데, 파운데이션도, 렌즈도, 섀도도 그대로이다. 홍콩은 소비의 도시다. 좋은 물건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할 수 있는 곳.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기 힘든 쇼핑몰을 몇 개 보고 나니, 조금 어지러웠다. 나도 물론 물욕이 있고, 사고 싶은 목록을 적어두곤 하지만, 과장하자면, 그곳에선 소비가 거대한 쇼 같았다. 쓰기 위해 벌고, 무얼 살지 고민하고, 잘 샀다고 좋아하는. 그 행위가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비행기와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매일 지나는 길에 들어서고, 지붕의 모양으로 잘려나간 익숙한 하늘을 보니 짧은 긴장이 풀린다. 별과 달이 잘 떠있는 걸 확인하고, 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맥주 한 캔과 먹었다. 정말 간절하게 원했던 깨끗한 내 이불에 누웠다. 조용해서 귀가 멍하고,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애써 원래 보내던 밤처럼 보내려 노력하다 예전 일기를 봤다. ‘불필요하게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를 돌보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런 시간을 불안해하지 말라는 거야. 익숙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 시대니까. 레퍼런스가 없어 초조하겠지만, 아주 잘 하고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뭔지, 잘 생각해봐. 그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걸 더 섬세하게 알아내는 게 생의 목표지.’     


다음날 매화를 보고 돌아온 엄마도 함께,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얘기를 하다 문득 아빠가 ‘다선이가 많이 컸구나, 그럼 됐지.’ 했다. 왠지 모르게 다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소주잔을 모으는 엄마의 취미 덕분에 여행마다 미션이 주어지는데, 도저히 그런 작은 소품들을 살 데가 없어서 포기하고 있던 차에, 공항의 디즈니 가게에서 귀여운 잔을 발견했다. 아빠가 상표도 안 뗀 미키 잔을 휴지로 쓱쓱 닦더니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다 같이 달밤의 마당으로 나가 꽃망울이 맺힌 매화나무를 봤다.      


오늘 아침에 지나온 풍경과 지금 들리는 새소리를 생각하면, 홍콩과 같은 지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짧고 강렬했고 아빠의 말 따마다 많이 느꼈다. 그럼 됐지.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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