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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Sep 08. 2024

경조사에 대한 생각

축의금과 조의금

지난 주말에는 친구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또 이튿날에는 지인의 모친상에 다녀왔다.


경조사는 한국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혼, 출산, 승진 등의 기쁜 일과, 장례와 같은 슬픈 일에서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거나 슬픔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서로의 삶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축의금과 조의금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축의금과 조의금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중요한 경조사에서 돈을 주고받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돈의 의미를 넘어서, 서로의 경조사에 마음을 함께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또 축의금과 조의금은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기쁜 일에는 축하와 지원을, 슬픈 일에는 위로와 경제적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상부상조의 개념으로, 나중에 자신이 경조사를 치를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조사에 참석하고 축의금과 조의금을 내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경우, 그리고 잦은 경조사 안내연락이 올 때에는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축의금과 조의금의 금액은 대체로 관계의 깊이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는 더 큰 금액을 주고, 거리가 있는 지인이나 직장 동료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을 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축의금과 조의금 문화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보다 덜 형식적이고, 꼭 돈을 주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경조사를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축의금과 조의금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관습이지만, 개인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서 그 의미와 실천 방식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은퇴를 하고 보니 과거 직장 다니던 시절에 비해 생활비와 용돈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직 국민연금을 신청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매월 사용하는 생활비는 분명 한계가 있다.


요즘은 불필요한 지출을 억누르느라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아니, 이제는 맘 놓고 쓰고 살아야 하는 나이, 인생을 즐길 나이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절약이 미덕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지출의 대부분이 어디에 들어가는지 한번 파악을 해 봤더니 놀랍게도 애경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어떤 달은 30%를 넘는 경우도 있었다.


애경사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에 얽혀 있는 사람들과 맺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이러한 인간관계를 저버리기는 어렵고, 또 한국 사회에서는 품앗이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지금 애경사비를 부담하면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이러한 애경사비가 가용비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관계를 정리해 버리기에는 이미 시기가 늦어 버린 것 같다.


사실상 사회생활을 많이 줄여야 되는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과거부터 이어져온 질긴 인연을 무 자르듯 싹둑 잘라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나처럼 잔정이 많은 사람에게는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결혼을 축하하는 경사 비용인 축의금은 현장에 가지 않고 송금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친하거나 시간과 여건도 맞고, 또 하객들 중에서 만나고픈 사람이 꽤나 있을 때에는 꼭 참석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참석을 망설이거나, 마음을 송금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최근 코로나19 종식으로 부쩍 늘어난 결혼식에 가보면, 결혼할만한 자격과 조건을 갖춘 멋진 남녀의 자랑스러운 결합을 보게 된다.


다들 TV에서나 볼 수 있는 연예인 급의 모습을 한 신랑 신부여서 식장에 가서 지켜보면 그들의 화려하고 멋진 장면에 질투심이 유발되기도 한다.


이제는 결혼식도 능력이 있어야만 치를 수 있는 행사로구나.


우리 자녀들은 이성을 사귀는 능력이 없는 것인지, 또 사귄다 할지라도 결혼을 언제 할 것인지, 결혼을 하더라도 과연 어떤 규모의 예식장에서 결혼을 치러야 할 것인지, 아직도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남아 있다.


사실상 요즘의 결혼식이라고 하는 것은 버젓한 직장을 갖고 있고 잘생기고 예쁘고 능력 있는 남녀의 결합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자리이다.


부모들도 자랑스러운 자녀를 당당하게 무대에 올리고, 하객들에게는 자녀를 잘 키웠노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과시하는 듯하다.


그러니 나같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질투심이 유발될 것임은 자명하다.


아니, 우리 애들은 도대체 뭐가 모자란다는 말인가?


그런데 친구나 지인의 어르신이 타개한 경우, 빈소에 가는 내 마음은 매우 무겁고 경건하다.


결혼식이 살아가는 인생 과정 중 한 단계라고 생각한다면, 빈소에 찾아가는 것은 영원히 고인이 된 사람과의 마지막 이별식인 것이다.


유족에게 고인의 인생여정을 듣고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거나 그분의 삶을 회고해 보며 슬픔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나누는 숭고한 자리이다.


그러니 결혼식과 장례식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설령 똑같은 비용으로 축의금과 조의금을 낸다 하더라도 마음 쓰는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식은 참석을 안 하고 은행 송금으로 대체해도 마음에 큰 불편함은 없지만, 장례식장에는 왠지 꼭 가봐야만 할 것 같다.


사람의 일생을 살아가면서 생로병사의 단계를 거치기 마련인데, 결혼식은 생에서 로(老)로 가는 긴 과정의 앞부분에 위치한 한 순간에 불과하지만, 장례식은 마지막 이별인 사(死)에 해당되므로 그 무게감과 느낌이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결혼식에는 직접 몸을 움직여 참석하는 경우가 적을 수도 있지만, 장례식만큼은 나름대로 시간을 내어 챙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쨌든 앞으로도 축의금과 조의금 지출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니, 적절히 운영의 묘를 살려가며 균형 잡힌 생활을 해나가야겠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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