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훔친 남자
기업 소설 <강남역 미아> 1장 4화
- 숫자를 훔친 남자
옥상 위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강민석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달라져 있었다.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는 사람의 눈이었다. 예상 밖의 변수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손실을 계산하는 종류의 시선.
“회장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퇴직자에게 회사 기밀을 들고 다니게 두는 건 보안상 좋지 않습니다.”
우메다는 손을 뒤로 모은 채 대답했다.
“기밀이라면 왜 자네가 먼저 찾으러 왔지?”
감사팀 남자 둘은 서로 눈치를 봤다. 회장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뀌는 걸 느끼는 표정이었다.
강민석은 잠시 멈췄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는 리스크를 관리하려는 겁니다.”
“리스크?” 도윤이 말했다.
“내가 리스크였나?”
강민석은 고개를 돌려 도윤을 봤다.
“선배님은 늘 현장을 잘 아셨죠. 하지만 회사는 현장만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숫자로 굴렸나?”
“숫자는 결과입니다.”
도윤은 피식 웃었다.
“아니. 네 숫자는 연출이었지.”
윤서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 남자의 싸움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걸 아는 듯했다.
우메다가 짧게 말했다.
“USB를 열어.”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요?”
윤서진이 작은 태블릿을 꺼내 내밀었다.
“오프라인 장치입니다. 외부 연결 없습니다.”
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준비가 너무 완벽했다.
처음부터 회장은 이 장면을 설계한 것이다.
USB를 꽂자 폴더 세 개가 떴다.
KR_Q4_Adjusted
Hospital Incentive Mapping
Chairman Brief Only
강민석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도윤은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표가 나타났다.
월별 매출 실적. 병원별 처방량. 그리고 붉은색으로 수정된 숫자들.
실제 출하량보다 높게 반영된 매출.
다음 분기 실적을 당겨온 선반영.
반품 예정 물량의 미반영.
감사팀 남자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도윤은 차갑게 말했다.
“이건 회계 분식 직전 수법이군.”
강민석은 즉시 반박했다.
“업계에서 흔한 조정입니다. 타이밍 문제일 뿐 위법은 아닙니다.”
“그럼 왜 숨겼지?”
“숨긴 적 없습니다.”
도윤은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병원 리스트가 떴다.
대학병원 교수 이름, 구매위원회 영향력, 접대 예산 코드, 가족 관계, 취미, 약점으로 보이는 메모들.
윤서진조차 얼굴이 굳었다.
“이건...” 그녀가 중얼거렸다.
도윤은 말을 잇지 않았다.
오래전 자신이 뛰던 병원들이었다. 그곳은 환자를 살리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런데 파일 안에서는 모두 거래 대상처럼 정리돼 있었다.
강민석은 목소리를 낮췄다.
“현실입니다.”
“더러운 현실이겠지.”
“순진하군요, 선배님.”
강민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선배님이 만든 학술 마케팅도 결국 처방을 얻기 위한 시스템 아닙니까? 저는 더 효율적으로 했을 뿐입니다.”
도윤의 턱선이 굳었다.
“나는 의사를 설득했지. 넌 약점을 샀다.”
짧은 정적.
우메다가 세 번째 파일을 열라고 손짓했다.
도윤은 마지막 폴더를 클릭했다.
문서 하나가 떴다.
Chairman Brief Only – Succession Scenario
도윤은 첫 줄을 읽다가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우메다를 바라봤다.
문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한국 지사 성과를 기반으로 아시아 조직 재편.
강민석을 차기 아시아 총괄 후보로 육성.
한도윤은 “현장 영향력 과다, 통제 어려움. 단계적 배제 필요.”
도윤은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결국 둘 다였군요.”
우메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조직은 늘 복수의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날 미끼로 쓰고, 저놈은 후계자로 키우고.”
강민석이 급히 말했다.
“회장님, 그 문서는 초안일 뿐입니다.”
우메다가 그를 바라봤다.
“자네는 조용히 있게.”
처음으로 강민석이 입을 다물었다.
도윤은 USB를 뽑아 손에 쥐었다.
삼십오 년.
그가 바친 시간은 충성이 아니었다. 단지 이용 가능한 경력이었을 뿐.
계단문 아래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여러 명이었다.
철컥. 철컥.
윤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경찰입니다.”
강민석이 놀라 외쳤다.
“경찰?”
윤서진은 처음으로 차갑게 웃었다.
“익명 제보가 있었거든요.”
“누가?”
그녀는 강민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이 버린 사람들 중 하나겠죠.”
옥상문이 열리며 형사 둘과 회사 법무팀장이 들어섰다.
도윤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게임은 회장과 강민석, 자신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사람은, 지금까지 조용히 서 있던 윤서진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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