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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 Aug 19. 2021

밝은 밤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제주도 여행 4일 동안 매일 내 옆에 함께한 책이다. 바닷가 앞에 앉아 읽으며 눈물이 나 혼날 뻔하기도 하고, 잠시 여기가 바닷가임을 잊기도 했으며, 또 바닷가 앞에서 읽어 더 좋았던 순간도 있었다. 다 읽어갈 때쯤 끝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주인공과 함께 계속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 슬프고 슬픈 이야기뿐이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밤만은 아름다워서. 


'증조모-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4대의 삶이 한 소설에 담겼다. 주인공과 외할머니의 대화는 '위로'라는 영역을 뛰어넘어 증조모 때부터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줌으로써 주인공은 스스로 회복의 과정을 겪는다. 부모가 하는 위로나 충고가 때론 폭력적으로 느껴졌던 경험들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다 너 잘되라고' '너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명목 아래 나의 잘못됨을 들어야 하는 자리는 때론 상처만 남길 때가 많다. 


소설 속 외할머니는 그런 흔한 충고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서툰 위로도. 인간은 가장 힘들 때 필요한 건 어떤 말보다 자신의 옆 자리를 한편 내어주는 것. 너무 혼자 있지 않게 한 번씩 살펴봐주는 것. 이런 것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마음 곳곳이 너덜너덜해진 주인공은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회복해간다. 더 큰 슬픔을 가지고 살았던 우리 할머니, 증조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냈을 까 싶은 그 시절들이 책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자신은 하나도 없이 오직 모든 걸 희생하면서 살았던 여자들의 이야기.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강요되는 것들. 존재 증명으로 좋은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런 절차에서 하나라도 삐끗하면 삶의 낙오자처럼 부모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쯧쯧 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회. 그 속에 내가 있기는 한 걸까? 주인공은 스스로를 더 다그쳤던 자신을 발견한다. 그 다쳤던 마음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살펴본다. '희령'에서 주인공은 조금씩 스스로에게 솔직해진다. 


'희령'에서의 일들은 읽는 나에게도 작은 위로였다. 모든 게 두려워질 때면 한 번씩 펴보고 싶은 책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너는 너를 다그쳤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너에게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었다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을 거야. 아빠도 말했잖아. 넌 큰사람이 될 수 없을 거라고. 남편도 얘기했지. 네가 이룬 모든 것은 운일뿐이라고. 그러니 넌 더 단련되어야 해. 이런 취급에는 이미 익숙해졌잖아.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른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 한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통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어.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다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깐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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