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집 베란다를 너머 벚꽃들이 만개했다. 하늘 색까지 분홍빛으로 보인다. 창문을 열고 남겨두었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마지막 챕터 '비극 속에서의 낙관'을 읽어 내려갔다. 나의 경우는, 교통사고로 수술을 하게 된 비극이라기보다는 MRI에도 혈액검사에서도 잡히지 않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혀온 만성 통증과 같은 비극이었었어서, 비극 중 낙관을 찾으라고 할 것만 같은 이 챕터에서 멈춰서있었다.
그렇지만 수용소에서 몇 번이고 죽음의 시련을 이겨낸 저자의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싶었다. 봄의 기운에 나를 마취시킨 뒤 마지막 이야기를 읽어 내렸다.
2장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겪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 이 말이에요 선생님.'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꺼이꺼이 우는 것 같은 상태였다.
병든 자아와 상처를 품고, 비극 가운데 어떻게든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주변을 돕는 일에 열심이던 때가 있었다. 그 대가는 여기저기서 소진되고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나였다. 내겐 버젓이 시련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쭙잖게 덮거나 그때그때 모면하는 식으로 견뎌냈고, 내가 희생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것으로 얻은 평화를 내가 시련을 이긴 것이라 착각했다.
나는 시련을 버텨내는 것에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나를 잃어버렸다. 이게 나를 자학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나와 같이 스스로를 참고 이겨내는 것에 내모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불필요한 시련을 겪는 것은 자학에 불과하다’는 프랭클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나치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이 책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삶의 의미를 찾아라.' 그리고 '도무지 바뀌지 않는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우린 우리의 태도만은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내게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더 강력한 메시지가 있었다. ‘모든 시련을 버틸 필요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