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승 Jul 16. 2022

14. 신상 파괴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Atapuerca에서 Burgos까지 약 22km


4시 알람에 눈을 뜬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부르고스에 도착해서 일을 할 생각이었지만, 정원으로 나오자 보이는 보름달에 넋을 잃는다. 등에 멘 가방을 내려두고 달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진다. 한국에 있을 때도 보름달이 뜬 날이면, 가로등이 필요 없을 정도로 주변이 환했다. 바람이 선선하고 주변이 조용하니 굳이 일찍 출발할 이유가 없다. 나는 가방을 내려두고 정원 벤치에 앉아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빨리 출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니 또 새롭다. 순례자는 만월이 산 뒤로 완전히 가라앉은 뒤에서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르네상스 전까지 천 년 넘게 강성했던 종교는 문명의 발전에 방해만 된 게 아닐까? 로마가 가톨릭을 국교로 정한 뒤 철학자들의 도시 그리스를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지금보다 한층 진보된 세상에서 더 많은 물질적, 정신적 풍요를 가지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늘 과학의 발전에 대척점으로 여겨지던 종교 때문에, 권력에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신을 앞세워서 친 장난 때문에 우리는 지식에서 점점 더 멀어졌고 문화적 다양성도 파괴되었다. 신의 교리에 반하는 과학적 발견들은 무시당했고, 종국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람을 불에 태우지 않았는가?


현대에 와서도 종교 단체들이 부리는 말썽은 무지막지하다. 아직도 종교를 빌미로 전쟁 중인 국가가 있을뿐더러,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고, 타락한 목회자들은 믿음을 빌미로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 죄를 짓지 말기 위해, 짓더라도 뉘우치기 위해 있는 종교적 믿음은 오히려 면죄부가 되어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르고도 오히려 뻔뻔하게 구는 경우도 있다. 세금을 내려하지도 않고, 사이비 종교 문제는 잊을만하면 화두에 오르며, 길 잃은 사람들이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그들의 역할은 단순히 신을 찬양하도록 강요하는데 그쳤다. 현대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급속도로 사라지는데, 사람들이 신을 등졌다며 신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만 하고 있다. 신의 존재 유무와 별개로, 종교가 정말 필요하긴 한 걸까?




저 멀리에서부터 도시의 향기가 점점 강해진다. 팜플로나(Pamplona)를 지난 뒤로 도시는 처음이다. 중간에 들렀던 로그로뇨(Logrono)도 물론 큰 도시지만, 숙소가 외곽에 위치했던 탓에 그리 많이 둘러보지 못했다. 오늘 도착하는 부르고스(Burgos)는 대성당으로 유명한 도시다. 이번만은 마음 편하게 관광지를 조금 돌아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관광을 위해 순례길에 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의 규모에 반했는지 하루 더 머물다 가는 선택을 하는 순례자가 몇몇 보인다. 언젠가 조금 더 편하게 도시를 돌아보고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겠지만, 오늘의 나는 토해져 나오는 문장들을 적어야만 한다. 그래도 생각하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관광은 아니니까, 변명하면서 거리를 구경하기 시작한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종종 성당 예하 숙소에서 머물렀고, 일반적인 순례자 숙소보다 더 만족스러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돈을 받지 않고 기부 형식인데도 숙소 자원봉사자들은 더 기쁜 마음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며, 더 깊은 정성으로 맛있고 알찬 저녁까지 준비해준다. 같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긴 하지만, 강제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열띤 사명감은 현대인들의 쿨함, 시니컬함이나 계산적인 사고와 거리가 멀다. 남들보다 잘나 보이려 애쓰지 않고, 그저 신의 어린양으로서 스스로 선택한 봉사에 최선을 다하는 밝은 에너지에서 순례길을 걷는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며칠간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미사에도 참석하며 종교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 수 있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부르고스의 대성당처럼 유명하고 큰 경우에는 다를 수 있겠지만, 작은 마을의 경우 거리에서 보이는 청년들과 아이들이 성당 안에는 없다. 나는 성당에 남아있는 나이 든 사람들을 보며 세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고양감, 공헌감 그리고 안정감이다. 물론 현상은 복잡하다. 이 세 가지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할지라도, 떠올려진 생각들은 꺼내져야 만 한다.



순례자 숙소 (Albergue Municipal) 체크인 (좌) Burgos의 거리 (우)


숙소에 체크인을 마치고 일을 끝낸 뒤 거리로 나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은 강하게 내리쬐지만, 도시의 건물들이 만들어주는 그림자 덕분에 조금은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은 도시를 마주할 일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두는 게 낫다. 일단은 자본주의에 찌든 감자칩, 프링글스를 사는 것으로 도시 구경을 시작한다. 순례를 하는 동안 태블릿으로 글을 쓰고, 수업도 하기 때문에 보조 배터리가 더 필요하다. 야영을 하는 경우엔 충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나 스페인은 한국처럼 전자기기 액세서리 가게들이 흔치 않기 때문에 여러 가게에 물어물어 대형 보조 배터리를 파는 곳을 찾아낸다. 이러다 보면 도시 구경은 금방이다. 며칠 전 숙소에 두고 나왔던 태블릿을 챙겨준 나은을 위해 오늘 저녁을 사기로 했다. 도시를 걸으며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는지 둘러본다. 역시 나는 관광지보다 거리 구경을 더 좋아한다.




고양감은 원시 종교 때부터 종교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의식을 넘어서 종교적 초월 감 혹은 개인의 의식을 넘어 집단적 일체감을 주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카드다. 종교마다 차이는 있지만, 신에게 경배하기 위함이라는 명분 하에 종교 예식 동안 까다로운 절차나,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집단행동에 투자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의 자의식, 고유하고 합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일종의 황홀함을 느끼게 한다.


자의식을 흐트러뜨리는 대부분의 행동은 황홀함을 유발한다. 술, 마약, 섹스, 클럽의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단체로 춤을 추는 것 등. 이는 앞서 다뤘던, 자의식으로 태어난 고유성과 이방성을 흩트러뜨림으로써 의식이 있기 전 단계, 마치 필멸자로서의 무력감을 잊고 어머니의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듯 한 감정을 유발한다. 때문에 원시 종교는 집단으로 춤을 추거나 술, 마약 등으로 일종의 흥분 상태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초월자와의 접촉 혹은 결합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종교의 신비보단, 인간의 두뇌와 무의식의 신비함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마치 최면과 같다. 우리의 의식을 잠재우고 무의식을 꺼내 보임으로서 의식적,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단계까지 정신을 끌어올린다(내린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논리적, 현실적 세계와 상상(추구)하는 세계를 뒤섞어서 인지하는 정보를 교란시킨다. 종교적 체험의 원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공헌은 굳이 종교 단체가 아니어도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이 한 공동체에서 작게나마 어떤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공동체의 유지 혹은 공동체원들의 행복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감정. 우리가 어떤 집단에 속해있던 사회적 동물로서 추구하는 감정이다. 종교의 경우 예식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특정 역할을 수행한다던가, 헌금을 내면서 종교 공동체의 유지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단순 공동체를 위함이 아닌, 신이라는 초월적 가치를 위함이라고 받아들이면 자신의 공헌에 대해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엄밀이 말하자면, 스스로 만들어내게 된다.)


 



스페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타파스는, 위에 각기 다른 건더기만 올렸지 늘 바게트나 빵이 같이 있다. 심지어 단백질이나 비타민 등을 보충할 수 있는 고기, 채소를 보기도 드물다. 차라리 프랑스식 바게트 샌드위치가 그리울 지경이다. 누구나 동의하지만, 빵은 프랑스가 최고다. 결국 나은에게 보답하기 위한 저녁은 빠에야로 정했다. 한국에서 먹는 쌀과 같은 품종은 아니지만, 그나마 빵보다 밥이다. 아쉽게도 엄청 맛있지는 않았다. 이미 파리에서 맛있는 빠에야를 먹어본 경험이 있는 나에겐 냉동 돈가스처럼 맛은 그럭저럭 있지만 감동은 없었다. 언젠가 또 그녀와 만나는 순간이 온다면 더 괜찮은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날이 올진 순례길이 알려줄 것이다. 이제 숙소에 들어가 이탈리아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밤을 보내야겠다.





안도감은 성당에 남아있는 노인들을 보며 제일 처음 떠올린 단어다. 나는 비록 지금은 종교를 믿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가톨릭 신자다. 때문에 비록 신자가 더 이상 아님에도, 순례길을 하면서 성당에 들어가 미사에 참여하면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종교마다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종교 건물은 사람들을 받아주고, 품어주고 또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한다. 돈을 내야지만 이용할 수 있는 카페와 달리 성당은 언제든지 열려있다. 우리는 예식을 몰라도 들어가 쉴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순례자들이 거쳐가는 마을에 도착하면 성당에 들어가서 쉬기도 한다. 아 물론 스페인에선 시에스타(낮잠 시간, 약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 동안 성당도 닫혀있는 경우가 보인다.


노인들이 더 안도감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느꼈던 것처럼 오래전부터 그들의 쉼터였기 때문이리라. ‘인간적인'에서 다뤘듯, 우리는 유년 시절에 가졌던 경험들을 ‘가장 사람 냄새나는 경험’이라고 여기고, 가장 편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다녔던 성당, 그때의 경험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종교적 신념과 별개의 의미로 그들을 성당에 앉게 만들었으리라. 우리들이 어떤 초라한 삶을 살아도 언제든지 받아주는, 시간성을 초월한 가장 오래된 공간. 몇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나를 반기는 공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현대 종교는 종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아무리 과학적으로 발전한 세상에 살아도, 과학은 현재 우리의 위치를 알려줄 뿐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가르쳐주지 못한다. 인류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늘 종교 혹은 철학 역할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 단체는 여전히 신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고 외칠 뿐, 개인의 삶을 어떻게 꽃 피우고, 왜 건강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못한다. 그들만 여전히 르네상스 이전에 머물러 있다. 범람하는 수많은 정보와 변화 속에 우리들은 길을 잃었지만, 그들은 그저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한다. 목회자들도 이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젊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다. 과거 예수는 길 잃은 어린양들을 이끌었지만, 지금의 목회자들은 그럴 역량이 없다. 똑같이 두려움에 빠진 인간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그래 왔듯, 사람이 없어도 신은 존재할 수 있으나, 신자가 없다면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이상, 나는 더 이상 종교를 추구할 수 없었다. 여기에도 신비는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3. 위로, 더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