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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6. 2022

13. 위로, 더 위로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13일 : Belorado에서 Atapuerca까지 약 30km


새벽 일찍 순례를 시작한다. 오늘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넘어야 한다. 며칠 내내 폭염이 계속되어서 그런지, 새벽에 나왔음에도 이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밤길이 익숙지 않은지 헤드 랜턴을 켜고 앞을 보면서 조심조심 걷는다. 그리 맘에 들지 않는다. 불을 끄고 걸어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달은 밝다. 불을 끄면 처음엔 앞이 안 보일 수 있지만 2~3분만 지나도 눈은 그새 어둠에 적응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특히나 밤 눈은 주변시(자신이 관찰하는 대상 주변을 보는 시야)가 좋기 때문에, 발 밑을 보고 걷지 않아도 위험한 돌이나 자갈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더 멀리 보고 걸어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어둠 자체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 길 따라 보이는 헤드 랜턴들이 싫어서, 순례자는 속도를 내 다른 사람들을 앞질러간다. 내 앞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남들보다 앞서려는 쓸데없는 욕심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데 방해된다.

 




카를 마르크스는 약 150년이나 전에 활동하던 인물이지만 현대 사회에서까지 회자될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철학을 비판하거나 혹은 보완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학술서가 아닌 하루 에세이에 그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많이 부족할 수 있겠지만, 늘 그렇듯 본질적인 이야기들은 꺼내져야 만 한다. 그는 자본을 기준으로 지배계층인 자본가와 피지배계층인 노동자로 나누었으나, 이는 사람의 근본 욕망을 잘못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가장 핵심적인 욕망이 인간 사회 내에서 계급을 만드는 것은 맞지만, 자본은 핵심적인 욕망이 아니다. 마치 인셉션에 나오는 대사처럼 사람의 기저 의식에 깔린 행동 동기는 굉장히 단순하고 명료하다. 자본이라는 개념이 핵심 동기로 작용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모호하다. 돈을 신성시하고 추구하는 것은 쉬워 보일 수 있지만 대체 왜?라는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의 근본 욕망은 마치 야생 동물들이 투쟁을 통해 더 좋은 환경과 넓은 영역을 욕심하는 것과 같다. 안정된 서식처를 확보하면 생활이 편하고 유전자를 복제 및 계승시키는데 유리한 환경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물리적 공간의 특성이 인간에게 와서는 사회적인 영역으로까지 발을 뻗은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생존 경쟁에 유리한) 좋은 사람들과 넓은 인맥을 만들어두면, 더 편한 삶을 제공받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이런 경향은 현대에 와서 약간의 역효과가 났다. 단순히 팔로워의 숫자를 늘린다고 인맥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 소셜 네트워크만 없었더라면 살면서 절대 만날 일 없었던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 역효과로 많은 사람들이 더 열등감과 외로움에 찌든 삶을 산다. 그럴수록 자신의 환경을 더 불안하게 느끼고, 본능적으로 같은 행동(관계의 수를 더 늘리려는 강박)을 되풀이한다. 그 원인이 물리적, 심리적으로 안정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우리의 욕망이 현재에 와서 얼마나 뒤틀렸는지 감 안 온다. 

 



산을 아래에 있는 첫 번째 마을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여기서 하루를 묵으려고 했으나, 길 중간에서 다시 만난 이탈리아 친구들이 다음 마을까지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내일은 큰 도시에 도착하는데, 오늘 더 걸어가 둬야 내일 더 일찍 도착하고 더 편하게 관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보조 배터리가 필요한 나에게도 괜찮은 제안이다. 렇게 같이 두 시간을 더 걸어서 정원이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주변에 마트가 없어서 점심을 어찌할까 고민하는 차에, 먼저 도착해있던 이탈리아 친구들이 바에서 샌드위치를 가득 사와 나눠준다. 덕분에 여행길이 너무 편해진다. 그들에게 느끼는 감사함과 별개로 점점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나는 편하고 즐거운 여행을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닌데... 이렇게 같이 순례를 하고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닿는다면 힘든 여정을 함께 마친 귀한 친구들이 생기는 것일 테고 그것은 큰 축복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 순례길의 본질 자체를 놓치게 되는 것이고, 길 위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죽을 것이다. 내일 도착할 도시에서 그들과 같이 지내고 헤어지자고 결심한다.  





더 넓은 영역은 단순히 안정성을 가지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물리적, 사회적으로 더 넓은 영역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 커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길 원한다. 굉장히 끔찍한 경우에 해당하지만,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들도 이 욕망에 충실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연쇄살인마들은 어렸을 적 불우한 가정환경 등으로 이미 어느 정도 정신이 나가 있고, 그럼에도 자신의 힘,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그들이 죽이려는 피해자들에게 마치 신과 같다. 피해자들의 생사 결정권이 본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약한 상대를 골라 영향력을 확인하려 한다는 게 참 치졸하기 짝이 없다. 방법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이 악인들과 그저 SNS에 본인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어서 쓸데없이 팔로워 수를 늘리는 사람들의 근본 욕망은 동일하다.


결국, 관계를 형성하면서 인정 욕구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갈망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마르크스는 단순히 '자본'을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었지만, 돈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뿐, 영향력 자체가 될 순 없다. 자본 외에도 명예(유명함)나 권력 등이 영향력에 대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선 인간의 모든 행동 동기를 열등감으로 설명한 알프레드 아들러가 세상을 더 정확하게 바라본 셈이다. 만약 알프레드 아들러가 칼 마르크스보다 먼저 태어났더라면 그는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면 지배층, 피지배층이 확실하고 자본가를 악인으로 만들 수 있지만,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한다는 건 계급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한 집단을 겨냥하여 비판할 수 없다. 선악이 기준이 모호해진다. 치졸하게라도 자기 자신과,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선한 피해자로 남기고 싶었으리라.




잠시 동행을 하고 있는 한국인 나은과 함께 숙소 근처 바에 왔다. 날이 너무 더워서, 숙소에 가만히 누워있어도 땀이 나려고 한다. 맥주만 사 오려던 우리는 일단 그 자리에서 한 캔을 비우기로 했다. 나은은 오늘 숙소까지 걸으면서 60대로 보이는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고 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런저런 참견을 하면서, 순례길을 걷는 건 자소서와 이력서에 크게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은은 순례길까지 와서 이렇게 한국적인 대화를 하게 될 줄 몰랐다며 맥주를 들이켠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게, 길을 잃은 사람에게 조언해주려는 선한 마음이 아니라 그저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답했다. 자신들은 젊은 날들을 (혹은 그들의 자식들을) 자소서와 이력서를 위해 희생하면서 보냈을 텐데, 그 궤를 벗어난 존재를 보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이 행여 틀리지는 않은 건지 의구심, 그리고 곧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원하지도 않는 조언을 하며 참견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그렇게 자신만의 성공론을 떠들어가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세뇌시킨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편을 더 만들고 싶었으리라. 자신과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을 마주하는 게,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걸까? 왜 그들은 나이와 경험을 권위로, 조언을 핑계로 그들의 움츠러듦을 포장할까?

  

그리고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다.


결국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유, (필요함 이상의) 돈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이유도 이렇게나 단순하다. 사람들이 권위로써 인정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들을 많이 가질수록 더 안정적인 환경과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후 위계라는 가치를 더 자세히 다룰 일이 있겠지만 이는 인간들만이 추구하는 욕망이 아니다.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혹은 그 밖의 수많은 동물들도 위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기를 욕망한다. 그게 모든 생물들에게 부여된, 유전자의 명령이니까. 여기에도 아무런 신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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