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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3. 2022

12. 선하려는 강박, 선하다는 착각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12일 : Granon에서 Belorado까지 약 15km

며칠간 계속되는 폭염에 태양이 싫어지려고 한다. 오후 두 시부턴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땀이 난다. 오늘 목적지까진 서너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짧은 거리지만, 태양이 싫어서 꼭두새벽에 길을 나선다. 자연스레 걸음 속도도 빨라진다. 날이 어둡기도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기에 이전만큼 카메라를 자주 켜지 않는다. 세 시간 남짓을 쉬지 않고 걸어서 아홉 시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왔지만 이렇게 걷고 나면 반드시 배가 고파진다. 오늘 묵을 숙소에 배낭을 미리 맡겨두고 마트를 간다. 오늘의 순례 할당량은 채웠으니 남은 시간은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여기저기에 벽화가 가득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볼까 잠시 고민하지만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발견과 체험이 아닌 내 머릿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문장들을 토하는 것이다.





Vertue Signaling이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미덕 과시'라는 뜻을 가진 이 표현은, 소셜 미디어나 유튜브 등 커뮤니티 존재하는 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과시하는 행동을 뜻한다. 유튜브에서 정치 관련된 뉴스나 가십거리를 다루는 영상을 보면 마치 훈계하듯 정의를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거라고 (실제론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열렬히 외친다. 그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할 기회가 있다면, 그들도 그렇게 도덕적인 삶을 살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비판한 그 사람들은 엄연한 공인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아니냐, 그런 사람들이 도덕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평범한 소시민이고, 피 기득권층이라 가끔 비도덕적으로 행동해도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이렇게 변명할 사람들이다.


인터넷에 그렇게 미덕 과시를 하면서 제론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차라리 침묵하는 게 더 건강한 삶일 텐데, 굳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타인을 비판한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삶을 선택한 걸까? 대부분 사람들의 행동 동기는, 진취적인 꿈이나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도태에 대한 두려움. 남들보다 뒤처질까 무서워하는 마음. 그것의 이름은 열등감이다. 미덕 과시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열등감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화두가 되는 저 사람보다 잘난 게 없다. 자기 자신이 그나마 더 도덕스럽다는 착각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어떻게든 자기 위안을 하려는 행동 양식을 보면, 더 안쓰럽고 슬퍼진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수업을 마치고 입실을 하려니, 먼저 입실을 끝낸 이탈리아 친구들이 나온다. 이번 숙소의 봉사자 분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고 알려준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단순히 입실이나 묵으면서 필요한 소통이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할 상대가 있다는 건 장소가 어디든 한결 마음을 동그랗게 만들어 준다. 비교적 적은 인원이 사용하는 숙소고, 공용 부엌이 있다. 며칠간 동행하고 있는 나은과 함께 이탈리아 친구들을 위해 한국 음식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이 마트를 들러 어떤 요리를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아쉽게도 한국식 재료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사람은 항상 해결책과 차선책을 찾는다. 우리는 해물 파전과 찜닭, 그리고 채식주의자 친구를 위해 닭 대신 버섯이 들어간 요리를 준비하기로 했다.




설령 도덕성이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작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문제가 남는다. 사회적 선함, 도덕의 경계는 어디인가? 구체적인 사회적 규정을 끌어낼 수 있는가? 살인은 비도덕적이다. 봉사는 도덕적이다. 이런 구분은 쉽지만, 그 중간에 있는 경계는 늘 애매모호하기 마련이다. 몇 년 전 삼성 전자 유튜브 채널에서 시각장애인과 관련된 영상을 올렸다. 약 30분에 달하는 짧지 않은 영상이지만, 나를 소름 끼치게 한 장면이 있다. 영상 내의 시각장애인이 지나가는 행인과 부딪혀서 쓰러졌는데, 그 행인은 상대방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놀라서, 그를 일으켜주려고 무턱대고 손을 잡은 것이다. 장애인 입장에선, 낯선 사람이 물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손을 잡고 힘을 주면서 당기니 공포나 다름없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시각장애인과 부딪혔던 행인은 (약간의 패닉 상태에 빠져) 그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선한 행동을 한 것이다. 여기서까지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은 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모든 (긴급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맞는 배려를 행할 수 있는 존재인가? 당신 스스로가 정말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한 학자와 가톨릭 신부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 세상에는 분명히 공동 선, 절대 선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행동들도 존재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인간은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선을 추구하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뿐이다. 스스로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혹은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흉악한 연쇄살인마도 그 사람 나름대로의 선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악행조차, 그게 세계에 필요한 선이라는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실천으로 옮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종종 대화 주제로 나오는 성선설 성악설의 문제는, 성선설의 승리라고 볼 수 있겠다. 타인의 악한 행동은, 당신 볼 때나 악이고 당신이 사는 세계는 그리 객관적이지 않다.




숙소에 도착해 바로 준비를 시작한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찜닭은 오래 끓일수록 국물이 살고 야채가 부드러워지며, 파전 반죽은 미리 만들어두어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친구들도 다 같이 먹을 리소토를 만들기로 했기 때문에 부엌이 너무 혼잡해지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게 좋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만드니 신중해진다. 숙소에 간장이 있는 줄 알았는데 데리야끼 소스였다. 데리야끼 소스는 간장보다 덜 짜고, 더 달기 때문에 설탕 대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떻게든 한국 요리의 풍미를 살려야 한다. 나은은 찜닭에 파프리카를 넣고 싶다고 제안했다. 국물도 이미 간장이 아닌 데리야끼로 우렸는데, 안될 건 없었다. 흐물 해진 파프리카는 맛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에 데울 때 넣기로 했다. 내가 찜닭으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녀는 해물 파전 반죽을 준비했다.

 


이탈리아 친구 마티야는 레드 와인이 베이스로 들어간 리소토를 만들었다. 색깔도 꾸덕함도 마치 팥죽 같다. 동지도 아니고 폭염이 쏟아지는 한 여름에 팥죽을 보니 생소하다. 급하게 정한 메뉴치곤 조합이 좋다. 리소토와 찜닭, 해물 파전 모두 레드 와인과도 잘 어울리는 음식들이다. 성공적인 저녁이었다. 친구들의 만족스러운 외침이 끊이지 않는다. 닭 대신 버섯을 넣어서 요리를 한 것도 처음인데, 국물에서 느껴지는 향이 정말 풍부하다. 부침가루 대신 밀가루와 계란으로 만든 해물 파전은 막걸리가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명품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안 리소토는 음식들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정말 최고의 결과를 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아마도 그들에게 더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다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한 단계 더 넘어가서, 기적적인 경우로 도덕, 사회적 절대선을 꼬투리 하나까지 규정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게 만들어진 '도덕적 행동 규범'을 실천하는 삶은 과연 도덕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단순히 사회적으로 합의된 틀을 지키면서 사는 걸 선행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세계 2차 대전 때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다. 이후 그는 전범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했냐는 물음에, 그저 자신의 상관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실제로 아렌트의 책에서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생애를 자세히 다루는데, 일상생활에서의 그는 사악한 인물이 아니라 아주 평범하고,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악은 악의 소굴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그저 당연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들조차 악이 될 수 있다. '도덕적 행동 규범'에 적힌 대로 실천하는 인물은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라, 그저 규정에 수긍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전에 언급했듯이, 우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순하다고 말하지, 선하다고 하지 않는다. 토끼는 무해하고 약하다. 약한 존재는 강한 존재보다 더 환경에 강요받는 삶을 산다. 그리고는 그 환경 탓을 하지 절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도덕적 규범의 실천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확신할 수 있는 선행의 실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선을 찾아야 하고, 행동 양식으로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하며, 상대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자신의 '독단적 선'이 누군가에게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면, 좋은 의도였다고 핑계 대지 말고 사과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선행은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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