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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2. 2022

11. 타인을 위한다는 거짓말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11일 : Najera에서 Granon까지 약 28km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한다. 4시 10분이다. 30분에 울리도록 맞춰둔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내려온다. 어제 아침에 헤어졌다가 숙소에서 다시 만났던 마르틴과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마르틴은 내게 왜 길에서 만난 일행들과 같이 출발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순례길에 걷고, 생각하고, 글 쓰려고 왔다고 답했다. 물론 중간중간 수업하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다. 나머지는 길이 인도하도록 맡겨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짐을 챙긴다. 공동 침실에서 나오니 이미 한 친구가 깨어있다. 발에 물집이 너무 커서 걷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떠나는 거라고 한다. 순례자 길 위에는 무릎에 보호대를 하고 걷는 사람도 있고, 목발을 짚으면서 걷는 사람도 있고, 마르틴 같이 70살의 노인도 있다. 이 길은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 아닌, 걸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다. 떠나기 전 나와 면식이 있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다. 꼭두새벽이기 때문에, 헤어짐을 인사할 수 있는 건 깨어있는 자들의 몫이다. 혼자가 된 순례자는 다시 길에 오른다.



를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순례길이 이어지는지 찾지 못다. 구글 맵에 보이는 대로 도시 출구로 나와 걷지만, 어디에도 순례길의 표식 보이지 않는다. 어제 나은과 걸으면서 들었던, 가리비 껍데기가 순례자의 상징이 된 이유가 불현듯이 떠오른다. 그녀는 바다에서 발견된 성 야고보의 시체가 가리비 껍데기로 보호받고 있더라는 전설과 가리비 껍데기의 모양처럼, 여러 종류의 순례길이 결국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모이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줬다. 길은 어디로든 통한다.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순례자는 천천히 잠에서 깨는 해를 보며, 자신의 그림자가 리키는 방향으 걷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인간의 이타성이란 그것마저도 이기적인 토대 위에 있다. 아이유의 'Love poem' 설명에 제일 처음 등장하는 문구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가 선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을 돕는 게 즐겁다고 해서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타인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성격이라고 스스로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건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토끼를 보고 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토끼는 순하다. 무해하기 때문이다. 공격성이 없는 존재는 선할 수 없다. 타인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무례한 사람에게 화를 낼 줄 알지만 그 공격성을 잘 갈무리해서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에게나 선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타심이라는 단어에 눈이 돌아가서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도 걸린 건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포장하려고 안달이 났다. 그게 어떻게 이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기 포장을 위한 이기적 행위 아닌가? 정말 타인을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는 할까?


길가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푼돈 몇 푼 쥐어준다고 그 사람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당신 덕분에 그 사람이 오늘 하루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돈이 생겼다고 위안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모여서 구걸로도 하루 밥값을 충분히 벌 수 있다면, (사실 충분할 일은 없다. 남은 돈은 술을 사는데 써버리니까) 그 사람은 절대 구걸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구걸을 그만두는 것은 노숙자 복지 센터에 들어가거나,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다. 하지만 당신은 거지가 저런 결정을 하도록 유도할 생각이 없다. 그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적선은 아주 대표적인 이기적인 행동이다. 아무리 좋게 얘기해봐야, 값싼 이타심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단순히 '마음이 이끄는 대로'해도 되는 맘 편한 행동이 아니다. 정말 누군가를 도울 땐 그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 신중하게 고려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진흙탕에 빠진 상대방이 원하는 게, 그 자신의 진흙탕에서 빠져나오는 건지 혹은 누군가를 그 진흙탕으로 끌어들이려는 건지 조차 확실하지 않다. 에 빠진 사람이 구조를 하러 온 사람에게 사력을 다해 매달려서 결국 둘 다 빠져 죽는 사고가 종종 있다. 같이 죽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다. 생존 본능에 의한 패닉 상태에 빠지면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끌어내리고 본다. 그런 사람을 구할 땐 신중해야 한다. '나는 너를 구하려고 이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네가 나까지 끌어들이게 만든다면 나는 가차 없이 너를 발로 차고 밀어낼 거야.' 이게 누군가를 도울 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혼자 걷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새벽 순례길은 시간이 빨리 흐르는 느낌이다. 분명 같은 거리를 걷는데도 대낮보다 모든 게 더 빨리 흘러간다. 조금씩 어둠이 걷히는 하늘이 지루함을 덜어주는 건지, 어두운 탓에 지평선만 보고 걸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막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처에 열린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물론 아침은 출발 전에 먹었기 때문에 좀 다르다) 근육들을 풀어준다. 짧게라도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아 태블릿을 덮는다. 나는 늘 낮잠을 좋아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반을 더 걸었다. 조금 마을을 돌아보고 나니 어제 같이 어울렸던 이탈리아 친구들 몇 명이 보인다. 같이 걷자거나, 여기서 만나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모이는 걸 보면 순례길은 삶의 축소판 같다. 인연을 고집하지 않아도, 만날 사람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물론 엇갈린 사람들도 있다. 만나지 못해도 어딘가에서 잘 걷고 있겠지, 부디 무사하기를, 나도 무사하니까,라고 짧게 읊조린다. 이 친구들과도 순례길 어딘가에서부턴 더 이상 마주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괜찮다. 나는 매일 아침을 그런 생각으로 새벽 일찍 길을 나선다. 그저 오늘의 마주침에만 감사하고 즐기자.




그 정도의 생각도 없이 누군가를 돕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전혀 이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인정 욕구, 앞서 다뤘던 구원 욕구 때문에 혹은 그 사람에게 빚을 지우고 싶어서에 불과하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정말 도움이 필요한 타인은 들어가 있지도 않다. 자기만족뿐인 행동이다. 제대로 돕지도 못해 일을 그르쳐놓고 '너를 위해서 한 거'라느니,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한 거야'라느니. 그건 좋은 마음이 아니 쉬운 마음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마음속에서 끌어 오르는 목소리라면, 그리고 그게 타인을 위한 거라면 다 선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고, 그 상대가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면 차라리 침묵해라. 적어도 당신의 인정 욕구를 채우겠다고 멋대로 행동하고 훼방 놓지는 마라. 그럼에도 개입을 하겠다면 최소한 그건 이타심이 아닌 자기만족을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타인을 정말 돕겠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올 감사 인사를 포함하여 모든 대가가 없어도 괜찮아야 한다. 사소한 무엇이든, 무의식적으로라도 기대를 한다면 결국 (감사받고 싶다는) 인정 욕구의 파편이다. 물론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서, 거기에 대한 보답, 최소한 감사 인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도움을 받았을 때 얘기지, 타인도 나의 도움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나의 세상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런 틀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이게 상식이지 않냐고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서로의 세계가 너무 다르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법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 타인에게 필요한 도움이 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행동을 대가 없이 하거나 최소한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차라리 낫다.

   




Estella-Lizarra에서 처음 성당 예하 순례자 숙소를 경험한 뒤, 가능하면 다른 마을에서도 성당 예하 숙소로 찾고 있다. 이번에 도착한 Granon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당 예하 숙소로 들어간다. 자원봉사자 한 분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다행히 영어도 유창하시다. 지금까지 이용한 숙소들 중에서 가장 아늑해 보인다. 벽난로 옆으로 기타와 피아노가 보인다. 체크인을 마치고 재빨리 기타를 꺼내 조율하고 손을 풀어본다. 곧 도착한 다른 이탈리아 친구 마르티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 곡 부른 뒤 나에게 넘겼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노래들을 주고받았다.



오후 여섯 시가 넘자 다같이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샐러드에 들어갈 채소들을 다듬고, 다른 그룹은 식탁을 정리하고 식기를 세팅한다. 늘 부엌을 좋아하는 나는 안으로 들어가 재료들을 물에 씻기고 다 쓴 도구들을 닦는다. 모든 세팅이 끝나고 다같이 자리에 앉았을 때, 메인 음식이 준비되기 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피아노 근처에 옹기종이 앉아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대부분이 이탈리아 사람들이라 모든 곡이 생소하다. 기타를 건네 받아서 몇 곡 부르고 박수를 받는다. 음악에 노랫말은 중요하지 않다. 레드 와인과 음악이 어우러진 밤이 저물어 간다. 함께 뒷정리를 마친 뒤 예배당으로 가서 담소를 나눈다. 대공동의 울림이 좋다는 이유로 또 기타를 건네 받는다. 내일을 생각하며 김동률의 <출발>을 연주한다.




사람들은 너무 이타적인 존재로 보이고 싶은 나머지 이타심은 좋은 단어, 이기심은 나쁜 단어인 양 사용한다. 마치 의사는 좋은 직업, 배관공은 나쁜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여담으로, 의사들이 살린 사람들 수를 전부 모아도 공공 위생 시설을 만들고 유지하는 배관공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렸을 것이다.) 의사들 중에서 좋은 의사가 있듯이, 배관공들 중에서 좋은 배관공이 있다. 결국 이기심, 이타심 단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이기심과 이타심 그리고 병든 이기심과 이타심을 구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이기적인 존재가 되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진솔하게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애써도 이기심 없이 이타적이게 될 수 없다. 세상 사람이 다 병든 이타심에 오염된 것 같은 우리 세상에 필요한 건 건강한 이기심이다.


병든 이타심은 병든 이기심을 낳는다. 건강한 이기심은 건강한 이타심을 낳는다. 그러면 어떤 게 건강함과 병듦을 가르는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기서 스캇 펙의 사랑의 정의를 다시 가져오고자 한다. 자기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또한 그는 사랑의 반대편에 증오나 무관심이 아니라, 게으름을 올려두었다.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다. 그런 점에서 건강한 이기심이란, 나 스스로의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고, 병든 이기심은 자신의 게으름 즉, 편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장애물들에 부딪히고, 넘으려고 시도하는 삶을 살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장애물을 만났을 때 함부로 치워주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건 그 사람의 발전을 방해하는 일이다. 건강한 이타심이란 그 사람에게 장애물을 어떻게 넘을 수 있는지 알려주고, 격려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더 많은 감정이 소모될 것이고,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원래 그렇다. 자전거를 연습하는 아이가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스스로 탈 수 있게 기다려주고, 행여 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게 대비하고, 조금 다쳤을 때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것. 그 다침조차 하나의 경험이라고 알려주고, 아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한 발씩 한 발씩, 어렵게 나아가는 것. 스스로 건강한 이기심을 부려가면서 그렇게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해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남을 구원하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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