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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0. 2022

10. 아가페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10일 : Logrono부터 Najera까지 약 29km

오늘은 목적지까지 거리가 꽤 멀뿐만 아니라 오후 1시부터 기온이 30도 이상으로 올라갈 예정이다. 가능한 한 아침 일찍 나가는 것이 좋아 보인다. 4시 30분에 눈을 뜨고 가방을 챙긴다. 수면의 질은 순례길 역대급 최악이었다. 건물 바로 앞의 골목길에는 밤새 수많은 취객들이 지나갔다. 개 짖는 소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노래 부르는 소리가 그대로 내 귀마개를 뚫고 들어왔다. 내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마르틴도 일어나 준비하기 시작한다. 어제저녁까지 둘이서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나이를 잘 먹은 사람에게선 재밌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와 함께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 지 좀 뒤에 같은 숙소서 지낸 한국인 나은에게 카카오톡이 왔다. 내 물건이 아니냐는 물음과 함께 보낸 사진에는 내 태블릿과 키보드가 덩그러니 있었다. 갑을 잃어버린지  주가 지나니까 그새 바보가 되어 있었다.


새벽 일찍 Logrono를 출발하며 찍은 광장 사진과 숙소에 덩그러니 남겨진 내 태블릿


아가페라는 주제에도 몇 가지 예시를 제시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과, 형제 및 친인척들의 사랑 그리고 에로스와 별개로 연인에게 헌신적인 사랑이다. 론 연인을 넘어 누군가에 선행을 베푸는 헌신까지 이어볼 수 있겠지만, 이타심은 조금 뒤에 다루도록 하자. 세상 가장 숭고한 사랑을 꼽으라면, 역시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얘기하지 않을까. 어머니의 무한한 수고와 희생, 세상의 모든 의미가 아기라는 한 생명에게 집중되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 그 무한한 헌신에 고개 숙이지 않을 이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억지로 고개를 쳐들고 따져야 한다. 그게 내가 순례길을 걷는 이유니까.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나는 신과 싸우러 왔으니까.




다행히 처음 지갑을 잃어버린 날처럼 당황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태블릿을 두고 왔다는 것을 기도 전에 나은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녀는 흔쾌히 내가 있는 곳까지 가져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마을에 도착해서 수업을 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알아챘을 것이다. 그땐 이미 다른 누군가가 내 태블릿을 가져갔거나, 숙소에 그대로 있더라도 오늘의 목적지와 수업 전부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연락처를 먼저 물어본 것도 그녀였다. 타이밍의 연속이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인데,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다니. 기적인지, 신이 나를 가지고 놀음을 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말해준 대로 앞으로도  일만 남았거나, 혹은 내가 반문한 대로 모든 운을 순례길에서 다 써버리는 듯하다. 마르틴과의 동행을 포기하고 해가 뜨고 있는 호수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순례길은 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다.



바보 같은 두 번째 실수로 일어난 사건은 시계침의 방향을 바꾼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근처에서 야영을 한 독일인 친구를 만난다. 그의 배낭에 하늘색 우쿨렐레가 있다. 방금 막 잠에서 깬 그는 커피가 끓기를 기다리며 내게 간단한 코드를 몇 가지 알려준다. 급하게 배운 코드들로 한 곡 불러본다. 그의 답례 곡도 들으며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낸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고 그렇게 한 시간을 놀았다. 회가 된다면, 우쿨렐레를 하나 들고 남은 순례길을 걷는 것도 좋은 생각일 듯하다. 물론 가방에 남은 자리는 없지만, 어떻게든 가지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왜 남들은 짐을 비우면서 걷는 순례길인데 나는 자꾸 하나하나 채워가게 되는 걸까. 그만큼 비어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무사히 호숫가까지 도착한 나은에게 태블릿을 전달받고, 나는 그녀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진화론을 꺼내 든 찰스 다윈만큼 매정한 과학자가 현대에도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기적 유전자>를 출한 리처드 도킨스를 제일 먼저 언급할 것이다. 나의 에세이도 그의 주장을 많이 닮아있다. 결국 인간은 유전자의 보존 및 계승을 위한, 유전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생체 기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과, 인간의 삶 그 어디에도 신비가 없다고 말하는 내 에세이. 나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 결국 사람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만들듯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생체 기계다. 아가페의 궁극점으로 보이는 모성애도 그 틀에서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다.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계승한 개체를 보호하도록 명령한다. 애초에 모성애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분비되는 게 과학적으로 밝혀졌는데, 여기 위에 어떤 신비를 덮 수 있으랴.


또한 스콧 펙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하는 내리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세상에 유일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머니를 향한 아기의 사랑밖에 없으며, 오히려 부모와 세상을 통해 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아기 자의식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기의 무조건적인 사랑도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세상과 자신을 구분 짓지 못하는 신생아는, 자기 자신을=세상 만물을=어머니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과 다른 대상이라고 구분 짓지 못했기 때문에, 특정 대상을 사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어느정도 자의식이 형성되고 나서도,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모체에게 복종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결국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특정 호르몬 분비의 결과이고 심리학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포장하지도 못한다.




나은은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들과 같이 걷고 있었다. 그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순례를 시작한다. 순례길에서 한국인과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된 내 머릿속엔 한국적인 마인드와 프랑스적인 마인드가 서로 격한 토론을 한다. 한국인 최승도는 '순례길에서 만난 한국인과 대화하기 좋은 주제 모음집'이라는 책이 세상에 있나 머릿속으로 검색해본다. 프랑스 유학생 최승도는 그냥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아님 조용히 길이나 걷자고 제안한다. 돌이켜보면 한국인 최승도는 인위적인 주제들을 정해서 자연스레 말을 거는데 젬병이기 때문에, 프랑스 유학생 최승도의 말을 듣기로 한다. 그녀에게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침묵에 익숙하다. 부디 이런 나를 너무 어려워하지 않기를, 짧게 소망하고 걸음에 집중한다.





유전자 계승적 관계가 아닌 형제 및 친인척들과의 관계도 사실상 리처드 도킨스 선에서 정리가 가능하다. (늘 강조하듯, 한 가지 이론이 전부를 대변하진 않지만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생체 기계로서의 인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본인의 유전자를 온전히 다음 세대로 이어가면서 보존시키는 것이지만, 세상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다 보니 불의의 사고로 자신의 유전자를 계승한 존재가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유전자가 택한 전략은, 완전히 복제 및 계승된 관계가 아니더라도, 유전자 유사성이 비슷한 개체를 보호하고 지원하도록 (즉, 애정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한 유전적으로 비슷한 개체는 선천적 기질이나 성장 환경이 비슷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사한 고유성이 형성된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고유성을 지닌 존재와 어울린다.


타인이나 연인을 향한 일방적인 헌신을 병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부류는 상대방을 깊이 사랑한다기보단, 자기 자신에게 내재된 구원 욕구가 강한 경우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미성년자 인신매매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전문적인 다큐라기보단 인터뷰 영상이었는데, 거기서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연간 십만 명의 미성년자가 납치되어 팔려나가고 있으며, 사라지는 아이들 중 만 13세가 가장 많다. 아이들을 꼬드기는 방법으로 과자 사줄 게와 강아지를 잃어버렸는데 찾아줄 수 있니 중 무엇이 더 잘 통하냐는 질문에 전문가는 후자를 짚으며 아이들은 모두 강아지의 구원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언급했다. 과연 아이들만 그렇다고 말하고 얼무어 버릴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필요한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헌신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기서 이후 더 자세히 다루게 될 서사성이라는 개념을 짧게 나누고 싶다. 우리는 이야기적 존재이고, 모두 서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비록 그 역할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연인 옆에 남아 헌신하는 비련의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본인의 서사성을 고집한다. 병적인 헌신은 이런 고집에서 나온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과보호나 과한 개입 중 일부도 이런 경향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나 희생하고 있잖니, 다 너를 위해서야. 그러니 자식인 너는 비련의 주인공인 나의 서사를 이어가도록 옆에 있어야 해. 네가 나로부터 독립해버리면, 내 서사는 끝이 나기 때문이야. 그렇게 된다면 다 너 때문이야. 병적인 헌신은 타인의 성장과 자아의 완성을 방해한다. 그건 말 그대로 '독'이다. 그럼에도 그런 행위를 지속하는 건 근본적으로 이타성과 거리가 먼 이기적인 마음에서 온다.




몇 번의 사소한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도착지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체력적으로 덜 지치는데, 이제 슬슬 순례길에 익숙해지는 건지 혹은 누군가와 같이 걷는 길의 시너지 덕분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소 체크인을 마치고 업을 하는 동안 나은과 일행은 거리로 나갔다. 짐 정리까지 마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하루 종일 같이 걷는 일행이 있었던 적은 처음이다. (비록 막바지에 갈라졌었지만,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들과 순례길을 쭉 같이 걸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동시에 깨닫는다. 각자 다른 사연을 들고 오는 산티아고지만, 한 가지 법칙은 지켜야 한다. 누군가와 같이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다음날 가장 이른 아침에 홀로 짐을 짊어져야 한다. 순례길은 인연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만남과 헤어짐을 배우기 위한 곳이다. 나머지 순례길이 가르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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