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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10. 2022

09. 에로스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Viana에서 Logrono까지 약 10km.

매일 잠드는 곳은 다른데도 아침 일과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오전 여섯 시에 잠에서 깨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마치고 내려가 아침을 먹는다. 혼자 먹는 아침은 최대한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고집하는데, 이렇게 준비된 아침은 늘 토스트와 커피, 우유다. 나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나는 커피에 우유를 타지 않고 커피 한 잔과 우유 한 잔을 따로 마신다. 거기에 오렌지 주스까지 따로 한 잔. 다른 사람들은 빵 한 면에 마가린과 딸기잼을 바른 다음에 먹지만, 나는 한 입만큼만 빵 위에 올려서 (바르지도 않고 그냥 올린다) 먹는다. 그리고 다 씹어 삼키면 또다시 필요한 만큼 올려서 한 입. 이렇게 먹으면 먹을 때마다 조합을 다르게 할 수 있어서 맛이 더 재밌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식사를 마친 뒤 숙소를 떠난다. 전날 잠들기 전에 숙소 주인이 건네준 쪽지를 (포춘 쿠키처럼 제비뽑기로 뽑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펼쳐보았다. '어떤 때는, 몇몇 문을 닫는 게 나을 수 있다. 오만해지고 거만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이 문들은 우리를 어디로도 보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게, 나는 지금 순례길을 걸으며 인간의 모든 신비를 닫아걸고 있었다.




에로스. 연인과의 불타는 사랑처럼 가장 우리를 가슴 떨리게 만들고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게 (그야말로 신비성이 전무한) 있을까.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기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또한 '참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압도되는 그런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 있게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결정이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단순 애착이라는 감정에 불과하다. 이런 관계는 성적 결합의 욕구가 기본 전제이다. 더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지며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이런 식으로 인간성을 나락까지 끌어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성적 욕구가 절대 '없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강력한 동기이다.


특히나 이런 관계는 남성들에게 더 빨리 나타나 주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남성들이 성적 자극에 시각적으로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른 나이의 여성들은 성적 결합 욕구 자체보다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불안감을 많이 느낀다는 점에서 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합의한다. 에로스의 기본 전제가 '몸이 외로워서'인데 거기에 어떻게 신비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쉬쉬하는 (혹은 젊은이들만) 공리 아닐까?




마을을 벗어난다. 순례길은 어떤 형태로든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들이 있어서 표지만 쫓아가면 된다. 종종 표지를 놓치거나 사라진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럴 때만 구글 맵의 도움으로 다시 길 위로 오른다. 휴대폰을 자주 꺼내지 않고 길에 (혹은 길에서 떠오르는 생각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순례길의 가장 큰 장점 같다. 오늘도 조금만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번 마을부터는 순례길을 하면서 처음 스페인에 진입했던 Navarra지방을 벗어나게 된다. 스페인은 지방마다 야영에 대한 규정이 다르고, 새로운 지방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합법이 아니기 때문에 최소 며칠간은 야영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따라서 하루는 너무 멀리 가지 않고 천천히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눈앞에 포도나무 밭이 보인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멀리서만 보이거나, 가까워도 밭에 들어가기 애매해서 스쳐가기만 했는데 바로 앞에 나무에 포도가 자라고 있어 다가가 관찰한다. 오늘 저녁은 와인을 곁들이면 좋겠다.




마치 가톨릭에서 말하는 원죄처럼 모든 사람 안에는 존재론적 외로움이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자의식이 형성된 것의 대가로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에로스적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오르가슴의 종점에는 마치 이 외로움이 채워지는 듯 한 강력한 희열이 생기고, 한 순간 자의식과의 연결이 끊겼다고 느낄 만큼 뜨거운 일체감을 제공한다. 마약과 같다. 물론 모든 젊은 연인들이 다 성적 결합만을 위해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기엔 우리 사회가 그렇게 풍기 문란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전제 욕구라고 하더라도, 그걸 그대로 표출할 만큼 야만적인 사회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포유류는 수컷이 구애하고 암컷은 선택하도록 진화되었으며, 임신이라는 일종에 취약 상태에 빠진 암컷은 자식과 자신을 보호할 만큼 강하고 책임감 있는 수컷을 원한다. 그러니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최근 피임 기구가 더 다양해지고 안정화됨에 따라 이런 경향성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고작 백 년도 되지 않은 신생 문화가 인간 본질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적 관계에 성욕 말고 어떤 본질을 덧붙여볼 수 있을까?


심리학자 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행동 동기에는 열등감이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두뇌에는 동족 내에서 본인의 사회적 계급을 파악할 수 있는 계산기가 내장되어 있다. 우리는 처음 누군가를 만났을 때도 본능적으로 (동물적으로) 상대방과 나의 위계 차이를 비교한다. 인간 중에선 특히 남성이 더 두드러진 경향을 보인다. 열등감이 항상 긍정적인 행동 요인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등감이라는 단어에 불쾌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열등감은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느냐에 따라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행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행동"이 중요하다. 말은 항상 쉬운 법이니까.) 애인을 만들고 싶으면, 본인을 꾸미는데 쓰는 돈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옷을 사주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결국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는 법이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보면 분명 열등감은 긍정적인 요인이 맞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을 부정적인 요소로 규정해 놓고, 그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열등감은 이내 인정 욕구가 된다. (내가 인식하는) 이 세계에선 내가 주인공인데, 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까,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인정 욕구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동은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을 지라도 이미 타락해버린 동기다. 자기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 '보도록' 만드는데 혈안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인정 욕구를 채우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애인을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이어도, 자신의 연인은 자기를 인정해 줄 '의무'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결국 스콧 펙이 언급한 발전적 관계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이런 저급한 욕망이 위치할 수 있는 곳은 그래 봐야 에로스의 다음 단계다. 아니, 차라리 에로스적 관계는 솔직하기라도 하지. 결국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아닌가. 인정 욕구에 대한 내용은 이후에 더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늘 묵을 순례자 숙소 앞까지 도착했을 땐 오전 10시가 막 지난 참이었다. 어제 같은 숙소에 묵었던 마르틴도 이내 도착했다. 숙소가 열기까진 아직 세 시간이 남았고, 나도 그 사이에 수업이 하나 있었기에 둘이서 근처 카페로 향했다. 마르틴은 70세의 독일인 할아버지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며,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도 구사할 줄 알기 때문에 어제 숙소에 들어갈 때부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둘이서 수업 직전까지 계속 수다를 떨었다. 마르틴은 도시를 둘러보고 싶지만 무거운 가방이 부담이고, 나는 반대로 수업 때문에 카페에 남아있어야 하기에, 나는 흔쾌히 그의 가방을 맡아 주었다. 수업을 마치고 둘이서 사이좋게 숙소에 입실했다. 숙소에는 먼저 입실한 한국인 여성분이 있었다. 짧게 대화를 나누고 집필 작업을 계속했다. 작업하기 너무 좋은 공간이 있어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충분히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Logrono에 위치한 순례자 숙소(Albergue Parroquial Santiago El Real)의 휴식 공간


앞서서 7장에서 언급했 '자기가 인식하는 세계를 지키기 위함'의 영역도 물론 포함될 수 있다. 상은 혼돈과 변화로 가득하고, 우리가 새로 얻은 정보를 채 해독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던 정보가 갱신되는 삶을 산다. 자신이 그린 세계 지도를 매번 수정하는 것은 (동시에 그게 맞는지 아닌지 치열한 고민을 하면서)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타인이 정리해준 정보에 일부 기댈 수밖에 없다. 그게 우리가 블로그에 있는 후기를 읽고, 인스타 맛집을 찾아보고, 영화 후기와 유튜브 댓글을 참고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연인의 존재는 여러 정보가 가공의 가공을 거쳐 자기 자신에게 오기 전의 최후의 관문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즉, 그런 방식으로 두뇌는 정보 판별의 중요한 결정자를 만들어서 각 정보마다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앞머리를 자를까 말까 고민할 때 남자 친구의 존재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조금 더 어릴 적, 나도 저런 에로스적 연애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게, 라는 약속은 내 눈앞에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유기체에게 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사랑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에게 하는 말이구나. 시간이 지나 헤어짐을 맞이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어도 이번에는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대상이니까 약속을 어긴 건 아니구나. 투사체만 바뀌었을 뿐이구나. 그러니까 사람들이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불타오르다 끝나도 약속을 어긴 건 아니구나. 그냥 투사체가 바뀌는 거구나. 애초에 저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한 적이 없었으니까. 저 투사체를 통해 나는 '나의 이상적 사랑'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그것을 사랑했을 뿐이니까. 참, 우리 초라하고 하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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