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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08. 2022

08. 플라토닉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Los Arcos 인근 야영지에서 Viana까지 약 18km

어젯밤 물을 구할 수 있는  근에서 야영을 하겠다는 나의 고집은, 결국 나를 저녁거리를 샀던 가게에서 10km는 떨어진 더 큰 마을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 긴 거리를 걷는 동안 수돗가가 없더라. Los Arcos에 들어와서 아직 열려있는 마트를 찾아 물을 구한 뒤 다시 마을을 빠져나와 2km는 더 걸었다. 그래도 일주일간의 순례로 체력은 붙었는지, 부상당한 발목과 무릎 통증을 제외하고 체력적으로 피곤하진 않았다. 늦게까지 글을 마무리하다가 잠들고, 다시 오전 여섯 시에 일어난다. 일 아침저녁으로 짐 정리를 새로 하는데, 익숙해질수록 전체 짐의 부피가 줄어든다. 그러면 나는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면서 다시 공간을 채우고 무게를 더한다. 처음엔 18kg였던 짐인데, 지금은 20kg을 넘었을 것이다. 점점 순례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오늘부턴 2주 차다. 튜토리얼은 끝났다.





물론 계산적인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는 어떠한 관계도 큰 틀에서 보면 계산을 떼고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단순 '아는 사이'보다는 더 애틋하고 진중한 관계들도 있다. 수많은 다른 형태의 관계 중에 세 가지를 꼽았다. 플라토닉,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 그럴듯한 이름이 붙었지만 이들에게도 결국 숭고함은 존재하지 않음을 하루에 하나씩 고백해보려 한다. 


단순 이익 관계를 따지는 관계를 넘고, 단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외로움을 달래려) 만나는 사람들을 지나치면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풍성해지는,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다. 혹은 에로스적 관계를 넘어선 연인일 수도 있다. 오래 만난 연인은 마치 친구 같으니까. 상대방의 못난 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존재 자체를 내 인생의 일부, 정신적 지지대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관계들 중에서 가장 진정성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오랜만에 마주치면 방금 전에 만났던 것처럼, 시공간성을 초월해서 느낄 수 있는 그들의 온도. 국에서 직행 비행기로 11시간이 넘게 걸리는 머나먼 이국에 있지만, 지금 당장도 내 옆에서 같이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

 



마을로 들어서는 데는 다섯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서 일을 마치고 순례자 숙소로 향한다. 이번 숙소 주인은 가차 없다.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행히 나와 동행한 독일인 할아버지가 중요한 것들을 영어로 설명해준다. 독일인이라더니 영어, 불어, 서어 다 쓸 줄 안다. 그의 사연이 궁금해진다. 모든 순례자는 각자의 사연을 들고 산티아고를 찾는다. 길 위에서 몇 번을 더 마주치게 된다면, 한 번쯤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이번 숙소의 특징은, 기부 형식이면서도 저녁에 다 같이 가톨릭 미사를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사가 마치면 저녁을 준비해주고, 또한 함께 먹는 시간을 가진다. 정말 마음에 드는 따뜻한 한 끼였다. 식당에서는 절대 주문할 수 없는 현지 음식과 각자 다른 언어로 맛있다는 표현을 하고 즐기는 가족적인 분위기. 누군가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다른 누군가는 이탈리아어와 불어를, 또 어떤 동양인은 영어와 불어를 쓰고 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한국어를 쓸 일은 없었다.   

순례자 숙소(Albergue) Parroquial de Viana에서 먹은 저녁




단순 물질적 교환을 넘어선 관계에는 영적으로 통하는 무언가가, 이를테면 운명의 이끌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렇게 뱉어버리고 나면 더 이상 그 관계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이 좋은 방향으로 규정지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루에도 엄청나게 많은 스쳐가는 인연이 있는 게 사람의 삶이다. 마치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있느냐는 질문에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과학자들과 같다. 아직 외계 생명체가 발견된 적은 없으나, 우주의 시공간적 규모를 봤을 때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말처럼, 하루에도 수십수백의 스쳐가는 인연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중에 극히 소수라도 나와 맞는 사람, 나와 더 가까워지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영적 교류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생기기 마련 아닌가.


결과적으로 아직 밝혀진 외계 생명체는 없지만, 실제 그런 인연은 존재한다고 반문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인연을 갈망하지만 우주는 생명체를 갈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갈망한다고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갈망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 낸다. 실제로는 서로 그리 잘 맞는 인연이 아닐 수 있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합리화를 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애초에 잘 맞는 인연의 정의와 기준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도 없을 테니, 우주 생명체와 비교하는 건 멍청한 생각 같아 보인다. 핵심은 이렇다. 맞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맞지 않는 사람들도 만나봤다는 뜻이고. 그렇게 만남의 폭을 넓힐수록 '상대적으로' 맞는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고, 그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욕심할 것이고, 결국 이 사람들이 최고라는 합리화에 이르게 된다. 이 얘기를 우주 생명체까지 꺼내가면서 하다니 우습다. 그렇게 혼자 낄낄대며 길을 마저 걷는다.



식사를 마친 순례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뒷정리를 시작한다. 누군가는 식탁을 정리하고, 다른 누군가는 설거지를 한다. 한 독일인 아이는 이탈리아 사람이 설거지를 마친 그릇의 물기를 닦는다. 야영까지 하는 입장이라, 숙소 경험이 많다고 할 순 없지만, 신기하게도 기부 형식으로 운영되는 숙소들이 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고객이 아닌, 손님의 신분으로 숙소에 머물러서 그런가 보다. 나는 영어를 쓰지 않고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스페인어와 필사적인 바디 랭귀지로 여주인과 얘기를 나눈다. 그녀는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이 숙소의 입실 조건은, 스페인어를 잘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라도 주워들으며 배울 의지가 있느냐이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의 세상을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의 시작점은 역시 앞서 다뤘던 의식과 인지, 고유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퇴출당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서 주변 환경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분류하기 시작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존재를 인지한다.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은 위험에 노출된 약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어떻게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갑옷을 두르기 시작한다. 자신이 규정한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자기만의 안전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인의 선천적 기질이나 경험에 따라 안전지대에 대한 민감도(모든 게 똑같은 하루는 존재하지 않기에, 어떤 기점에서부터 새로운 상황이라 느끼는지)와 불안성(새로운 상황에 얼마나 불안을 느끼고 얼마나 회피하고 싶은지)이 결정되고, 그걸 바탕으로 본인만의 갑옷을 두르게 된다. '잘 맞지 않은 사람'의 정의는 이를테면 그 갑옷을 갉아먹는 사람이다. 즉 자신과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은, 말 그대로 자신이 규정한 세상을 부정하는 존재와 같다.


결국 자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비교적 유사한 고유성을 지닌 사람들과 왕래를 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리면 자신이 평소에 알고 있던 세상과 다른 패턴의 등장에 위축되고, 그 패턴을 분석하고 통합하여 세상을 재규정한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스트레스가 동반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잘 맞는 단짝이나 오래된 연인이라는 관계의 본질은 (이것 하나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자신이 규정한 세상과 합치하는 코드를 가진 타인과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치밀한 계산이 들어간, 또한 그럼에도 건전한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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