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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08. 2022

07. 관계의 타락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7일 : Estella-Lizarra에서 Villamator de Monjardin까지  8km. 휴식 후 Los Arcos를 넘어 근방 야영지까지 12km. 총 20km.

이제는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다섯 시가 넘으면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억지로 눈을 다시 붙여 여섯 시까지 침대를 고집해본다. 어제는 잠들기 전에 맥주를 한 캔 비웠다. 순례길에서 맥주 한 캔은 수면제와 같다. 정말이지 꿈도 안 꾸고 푹 잔 기분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떠날 채비를 시작한다. 오늘은 8km 걸어가 도착하는 마을에서 을 마치고, 식량을 충분히 산 뒤  더 걸어가서 야영지를 찾을 생각이다. 숙소 주인들은 길을 떠나는 모든 순례자들과 포옹을 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있다. 아침부터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그들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처럼, 대가 하나 바라는 것 없이 타인을 축복할 수 있다는 건 세상 가장 깊고 진한 행복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게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만드는 비법일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의 앞길을 온전히 축복할 수 있는 것.



"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처럼 떨어져 있는 거야.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나오는 구절이다. 서로 평행선이 되어,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나아감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축복하는 것. 그런 관계는 요즘 멸종위기종이다. 늘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계에 신비를 부여하고, 그 신비의 주인공이 되려고 안달 나서는 타인의 삶에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든다. 그리곤 다 너를 위해서였다며 비겁한 변명을 내던진 채 꼬리를 말고 도망간다. 관계는 타락했다. 


어차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다. (이해한다 말해봐야 1/3 정도다.) 관계는 생존 경쟁을 사는 사회적 유기체의 필요에 의해 형성될 뿐, 어떠한 신비도 없다.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또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이득이 발생하니까 (혹은 잠재적으로 기대되는 이득이 있거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전부다. 단순히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오는 괴로움을 방지하기 위한 계산적인 선택에 포함이다. 가장 본능적이면서 동시에 최악이다. 지우개라도 좋으니 자신을 만져달라고 달려드는 생쥐와, 그늘에 모여 열심히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침팬지와 뭐가 그렇게 다른가? 그저 같은 공간에 같은 원초적 필요로 모여서 노닥거리면서 어떻게 신비를 논하나. 어차피 그렇게 한창 신비성을 부여하다가도, 마지막 고리가 안 맞으면 그새 돌아서서 그 전의 일은 다 잊어버리는 게 사람 아닌가?



마을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후 늦게까지 계속 내릴 예정이라, 더 심해지기 전에 가방에 방수천을 씌우고 우비를 쓴다. 처음 비가 왔을 때보다 더 안정적으로 대처하는 내가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순례길을 시작하고 첫 한 주를 채우는 날이다. 총 5주에서 6주 사이의 여정일 텐데, 이 정도면 슬슬 순례길 초보자 티가 사라지지 않았을까? 마을까지는 세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도착하자마자 수업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비를 피할 수 있어야 하며, 바닥이든 의자에든 앉을 수 있는 공간. 인터넷은 잘 터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소음이 생기지 않는 공간. 대부분 카페의 와이파이는 약하고, 실내로 들어가서 내 핸드폰 데이터도 잘 안 터질뿐더러 소란스럽다. 마을에 유일하게 열려있는 카페 옆으로 지붕이 설치된 농구장이 있다. 카페 안은 소란스럽고, 바로 앞은 비를 피할 수가 없어서 농구장의 콘크리트 바닥에 철퍼덕 앉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업을 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공간은 분위기 좋은 실내가 아니라 이런 길바닥이다. 수업에 대한 프로페셔널한 마음가짐은 나를 길바닥에 앉게 했다. 학생에게 또 어떤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사람들을 좋아한다, 타인은 소중하다 입에 닳도록 말하면서 정작 그 타인들을 온전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술 마시는 건 안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워요, 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고 내뱉는 걸까? 아무리 술에 취하는 게 몸에 안 좋다고 해도, 사람에 취하는 것만큼 치명적이 독이 세상에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계산적인 관계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어린 시절이 그립다는 얘기도 한다. 나도 물론 어릴 때 꿈같은 관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 나이 땐 생존 경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는 이례적이고 축복받은 한순간을 사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생존 경쟁을 위해 누군가와 협력하고 상호 발전하는 관계야말로 관계의 본질 아닌가?


행여 어떠한 이유로라도 관계에 신비가 있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다. 관계에 신비성을 부여하면서 산다는 것은 결국, 온전한 자신으로서의 삶은 없다는 말 아닌가? 심지어 이런 결정조차 그 본질은 이기심이라는 걸 눈여겨본다면, 이것보다 구차한 삶도 없다. 자아가 튼튼한 삶은 관계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더 많은 헌신을 베푼다. 관계에 집착하는 삶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스스로의 헌신을 강조한다. 그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자기만족이면서 스스로는 환각 상태라는 걸 절대 깨닫지 못한다. 관계를 타락하게 만드는 주원인이다. 먼저 자기의 삶을 구원해 본 사람만이, 다른 누군가를 어떻게 구원해야 하는지 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개인이 우선한다. 따라서 관계에도 신비는 존재하지 않으며, 특히 신비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모든 수업을 마쳤을 땐 이미 비는 그치고 하늘은 맑아져 있었다. 근처 마트에서 빵과 일회용 잼, 바나나를 구입한다. 냉장고를 보니 삶은 달걀을 판다. 반가운 마음으로 한 팩을 꺼내 계산 중인 점원에게 갔다 준다. 아침에 순례길을 나섰을 땐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많은 순례자들이 보였는데, 이렇게 오후 늦게는 순례자를 보기가 정말 드물다. 왜냐하면 순례자 숙소는 대부분 예약이 불가능하고, 선착순으로 들어와 방을 안내받기 때문이다. 숙소는 보통 오후 한 시에 열고, 대여섯 시만 지나도 대부분의 순례자는 이미 짐을 풀고 쉰다.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순례길의 가장 큰 장점이다. 어떤 마을에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내가 시간을 들이고 싶은 만큼 들여서 걸을 수 있다.

몇 시간을 걸어 텐트를 올리기 좋은 장소를 찾았지만 아뿔싸, 먹을 것은 충분히 사 왔으면서 물 한 통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 이렇게 된 김에 물을 구할 수 있는 수돗가가 보일 때까지 더 걸어보기로 한다. 비가 온 뒤라 바람이 선선하다. 이전까지 다뤘던 모든 주제들이 그렇지만, 관계는 유독 더 복잡한 구석이 있다. 사실 '관계' 하나로 사람들 간의 모든 연결을 일반화시킬 수도 없다. 어떻게 글을 이어갈지 고민하면서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다리의 통증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저녁만 되면 유독 훨씬 심해진다. 덕분에 나는 처음 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의 기분으로 돌아올 수 있다. 얼마나 헤매고 아파하다가 여기까지 왔나. 마지막 전장을 겪는 사람처럼, 아픔은 정당하다며 이를 악 물고 다리를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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