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승 Jul 06. 2022

06. 고유성과 이방성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6일 : Puenta La Reina-Gares 에서 Estella-Lizarra 까지 약 22km

새벽 순례를 시작한다. 오늘은 약 5시간을 걸을 예정이고, 수업 일정으로 오전 11시 전에 도착해야 한다. 오늘 처음으로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잤더니 몸이 가볍고 개운하다. 아직 통증은 남아있지만, 어제보다 더 좋은 컨디션으로 걸을 수 있으리라. 조용히 짐을 챙겨서 식당으로 내려온다. 자판기에서 파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어제 사둔 오렌지 주스도 한 팩 마신다. 순례길을 걷는 하루는 단순하다. 일어나서 걷고, 먹고, 쉰다. 그 외에 자질구레한 일들이 있지만, 저 세 가지에 가장 집중하게 된다. 마을 밖으로 나오니 가로등이 없는 다리 위로 별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많은 별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시력 때문에 맨 눈으로 잘 안 보여서 핸드폰과 거치대를 꺼내 촬영 버튼을 누른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너무 잘 나와서 되려 당황하게 된다. 고작 핸드폰이 맨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수한 별들을 보여줄 만큼 기술이 좋아졌다니. 핸드폰을 이용해 별을 잘 볼 수 있는 건, 문명이 준 축복일까 저주일까? 오히려 핸드폰이라는 도구가 없었다면 내 눈에 보이는 별들로도 아쉬움 없이 충분히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프랑스에 도착한 뒤로, 나와 다른 프랑스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오가면 오해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 내 불어가 많이 어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는 것에 익숙했고, 여러 번 다시 설명하거나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건 매일매일 일어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여러 프랑스인과 단어나 문장 선택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사람마다 또 선호하는 단어나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다르다는 걸 배운다. 어느 정도 프랑스 생활에 익숙해지고 불어가 고민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레 나올 때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단 외국어만의 문제일까? 모국어로 대화할 때도 오해는 생기기 마련이다. 오히려 외국어로 소통할 때 보다 더 빈번할 것이다. 외국어로 대화할 때만큼 주의하지 않고 내뱉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같은 언어 체계'를 사용하는 걸,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사과'라는 단어를 제시했을 때, 초등학생이 떠올리는 사과와, 재배업자의 사과와, 화가의 사과는 다 다를 것이다. 초등학생이 사과의 생김새와 맛만 떠올린다면, 재배업자는 맛있는 (잘 팔리는) 사과를 수확하기 위한 과정과 수고를 떠올릴 테고, 화가는 시장에서 갓 사온 사과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바래져가는지 그 색깔을 상상할 것이다. 세 사람에게 머릿속에서 떠올린 사과를 그려 보라고 하면, 굳이 그림 실력을 따지지 않아도 서로 사과에 접근한 방식이 다르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개개인이 모두 다르다. 사과라는 구체적인 물체를 예시로 들어도 각자 생각하는 게 이렇게 다른데, 믿음이니 외로움이니 사랑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개개인마다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정말 서로 소통을 하고 있긴 한 걸까?



순례자 숙소(Albergue) Parroauial San Miguel de Estella

다음 목적지에는 열 시 반쯤에 도착했다. 든든히 먹고 푹 쉬어서 그런지 발걸음이 담백하다. 가볍고 경쾌하진 않다. 등을 누르는 짐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괜찮다. 애초에 산뜻한 산책을 원했다면 순례길에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Estella-Lizarra는 큰 도시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산지에 있는 마을치고는 크다. 심지어 여기에는 아웃도어 전문 매장인 Decathlon도 있어서, 오후에는 필요한 장비를 더 구매하러 갈 생각이다. 또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순례길 처음으로 무료(기부 형식)인 순례자 숙소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설이 다른 곳보다 후줄근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규모가 작을 뿐 오히려 알차다. 침대 시트도 훨씬 좋고, 커피 등 음료와 과자도 구비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숙소를 안내해주시는 분들이 에너지가 넘친다. 지금까지 돈을 내고 이용한 어떤 숙소보다 밝고 편안한 분위기다.




실제로 우리가 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지에 관한 연구가 있다. 초면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대화 내용의 약 20%만 온전히 전달된고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 하나인 연인과의 대화는 어떨까? 60%? 80%? 고작 35%에 불과하다. 결국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의사소통의 효율성은 1/3 정도밖에 안된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말 서로 소통을 하고 있긴 한 걸까? 같은 언어 체계로 대화를 하고 있다 해도, 그게 같은 언어로 소통이 된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프랑스어와 한국어라는 '언어'였지만, 실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는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굉장히 중요하다. 기쁘거나 행복할 때, 재미있는 상황을 겪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게 웃고 있다는 걸 알아채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웃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같은 언어 체계와 문화를 공유하고, 어느 정도 통일된 교육 과정을 밟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삶으로 파고들면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다. 앞서 말한 공통점들은 오히려 '우리는 서로 다르고, 간단한 의사소통에도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라는 생각을 억제하는 장치인 듯하다. 일상에서 '이건 상식 아니야?'라는 표현을 종종 들을 수 있지만 사실 사람마다 상식의 기준도 다르다. 능이나 퀴즈 프로그램에서 이를테면 룩셈부르크의 수도를 묻는 문제가 나오는데, 세계 지리나 룩셈부르크와 관련된 분야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수도를 아는 게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 정도는 아는 게 교양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교양 있는 삶은 단순히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남에게 잣대로 남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해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야 말로 교양 있는 삶이다. 이런 점에서 '상식'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남을 비하하기 위한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되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크다.



Iglesiq de San Miguel

소를 나와 마을을 걷는다. 평지에 건물들이 모여있는 거리보다, 높낮이가 다른 산지에 있는 거리가 훨씬 예쁘고 흥미롭다. 오르막과 내리막, 계단들이 마을에 재미를 더해주나 보다. 근처에 있는 성당을 눈여겨본다. 건물 자체가 거대하진 않지만, 마치 절벽 위에 세워진 듯한 느낌을 줘서 훨씬 웅장하다.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야 한다. 규모가 큰 마을이 아닌데 이런 성당이 여럿 있다는 건, 종교적으로 상징성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지만, 나는 마을에 대해 알려고 온 게 아니다. 순례자는 다시 순례자의 역할로 돌아간다. 광장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축구를 한다. 높이 뜬 공이 내 쪽을 향해 오길래, 멋지게 받아 아이들에게 주려고 했지만 내 어리숙한 발재간은 기어이 부상당한 발목으로 공을 받아낸다. 복숭아뼈에 맞고 튕긴 공은 아이들이 전혀 없는 곳으로 날아간다. 무척 부끄럽지만 다행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선천적 기질, 환경, 경험과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존재이다. 이는 단순히 생각이 다르다의 수준이 아니라, 실제 지각하는 정보도 다를 것이다. 우리가 같은 빨간색을 본다면, 정말 똑같은 색으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엄밀히 따지면 사람마다 색을 인식하는 원추 세포의 수와 민감도가 다를 텐데? 때문에 고유성이 크면 클수록 타인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내가 정말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나와 너무도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저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 간다. 그리고 이방인이 되면 될수록, 마음속 메워지지 않는 구멍은 더 깊어져만 간다. 명히 같은 시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작스레 나 혼자만 텅하고 튕겨 나와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 아, 나는 이방인이구나. 만 고유성이 생기는 것과 거기서 파생된 이방성을 느끼는 것은 어느 점에선 별개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고유성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방성은 당신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성을 느끼는 건 이전에 언급했던 의식과 인지의 문제다. 자의식이 태어나서 외로움이 동반되었다는 뜻이다. 의식만 없었다면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삼키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외로운 존재인지 깨달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외로움이 없다니, 얼마나 편한 삶일까? 남에게 매달릴 필요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지 않은가. 분히 복잡한 속사정은 나중에 더 꺼내겠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의식을 포기하면 된다. 내가 세상에서 동떨어진, 타인과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의식을 지워버리고 식물인간처럼 살면 외로움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와 같다. 그는 길 위에서 이리저리 차이고 아무에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고유성을 포기하면 된다. 맞다. 애초에 불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데, 뭐 어떠리?

매거진의 이전글 05. 외로움 혹은 고독이라는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