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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05. 2022

05. 외로움 혹은 고독이라는 이름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야영지부터 Puenta la Reina-Gares까지 약 11km.


떠날 채비를 시작한 것은 새벽 여섯 시 반이었다. 다행히 뇌우는 잠잠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풍을 겪었다. 만 나면 흔들리는 텐트 때문에 혹시 무너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쪽잠을 잔 게 전부다. 생각해보면 순례길을 시작하고 하루라도 정말 푹 잔 적이 없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거겠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오늘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의 야영은 더 마음 편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지개를 켠다. 근처에 물을 보급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어제부터 목이 말랐다. 더워지기 시작하기 전에 산 아래께까지 내려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텐트 구석에 치워둔 바나나 두 개와 샐러드를 꺼낸다. 아무리 급해도 금강산은 식후경이다.

 



이틀 전 지갑을 잃어버렸던 사건에서 언급했던, 책 <연금술사>의 산티아고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의 사색을 시작하고 싶다. 평범한 양치기였던 그는 이집트에 보물이 있다는 꿈을 꾼 뒤 가지고 있는 양들을 다 팔아서 이집트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 여행의 첫날, 아프리카에 도착해 배에서 내린 뒤 사기꾼에게 당해 전재산을 잃는다. 돌아갈 뱃삯도 없는 그는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크리스털 잔을 파는 가게에서 잔들을 닦으며 푼돈을 벌기 시작한다. 일 년을 꼬박 일해 배를 타고 돌아가서 양들을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번 뒤, 산티아고는 그 돈으로 다시 이집트로 향하기 시작한다. 여정을 통해 점점 세상과 자연의 흐름(지표)을 읽을 수 있게 된 그는 사막의 한 오아시스에서 운명의 여인 파티마를 만나, 이집트에 묻힌 보물을 포기하고 여인과 함께 오아시스에 남을까 고민한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연금술사는 산티아고가 보물 찾기를 포기하고 파티마와 함께하면 처음엔 행복할지라도 점점 삶의 지표를 잃게 될 것이라 경고하고, 파티마는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산티아고가 이집트로 떠나도록 권유한다. 결국 보물도 찾고 파티마와 재회도 하고, 해피 엔딩이지만 나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삶의 지표를 잃고 구렁텅이로 추락하면 뭐 어때서? 보물도 얻고 인도 지켜내다니, 그거야 말로 너무 이상론이 아닌가?



마을 Uterga에 위치한 순례자 숙소(Albergue) Casa Baztan

순례길에서 다급함은 적이라는 사실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상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한 발씩 내딛으며 산을 내려갔다. 순례의 첫날부터 엊그제까지 이래저래 극적인 상황들이 있었지만, 사실 순례 대부분이 시간은 지루함 그 자체다. 나야 여행을 목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니 괜찮지만, 웬만하면 혼자 오지 않는 게 낫겠다. 즐거운 순례길 위에서 네 시간 동안은 '안녕하세요', '좋은 순례 되세요' 등 간단한 주고받기 말고는 입을 닫고 있을 테니까. 목가적인 풍경도 점점 눈에 익어간다. 그렇다니까, 멋있던 풍경도 적응하면 별거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을을 통과하는데 여기저기 고양이와 강아지로 가득 찬 순례자 숙소가 보인다. 정문에는 고양이 두 마리, 옆 벤치에 또 두 마리, 2층 발코니에는 강아지 세 마리와 고양이 또 오른쪽 창가에서 밖을 쳐다보는 고양이. 저 저기서 묵으면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겠군. 조용히 쓰다듬고만 있어도 충분한 휴식이 될 거야.




세상의 어떤 만남은 서로의 성장을 가져오지만, 또 어떤 만남은 서로를 무너지게 만든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다. (무너짐 뒤에 오는 성장은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게 비록 약속된 추락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분한 낙화는 심지어 아름답기도 하다. 내 삶이 철 지난 꽃처럼 사그라들어 사라질지라도,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각오는 죽을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빛에 달려드는 불나방 같다. 삶을 불태워가며 누군가를 한껏 껴안는 삶이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렇다면 사람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이 외로움은, 혹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음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숭고함일까?


사실 인간은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나 외로워'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포유류도 외로움을 느낀다. 유대감을 필요로 한다, 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갓 태어난 생쥐는 모체의 돌봄(신체적 접촉)에서 단절되면 아무리 식량 보급이 충분해도 죽어버린다. 심지어 어떤 실험에서는, 생쥐에게 음식이 나오는 버튼과 스킨십을 해주는 버튼 (스킨십의 주체는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다) 중 한 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는데, 다들 음식보다 스킨십을 원했다. 또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스킨십(촉각적 자극)이라는 사실까지 파악할 수 있다. 인간 아이로 왔을 때 훨씬 더 복합적인 조건인 건 사실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무의식이 어느 정도 형성되는 만 7세 이전까지 스킨십을 포함한 여러 방식으로 부모와 안정적인 유대감을 쌓지 못하면, 이후 새로 관계를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복잡한 교우 관계가 처음 시작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은 결정되었다는 말이다.



순례자 숙소(Albergue) Pqdres Repqrqdores 안뜰

열 시쯤 도착한 순례자 숙소는 아직 닫혀있다. 곧 수업이 있기 때문에,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구석을 찾는다. 저번 수업 땐 근처 성당에서 정각마다 울리는 종이 그렇게 번거로웠는데, 다행히 이번엔 주변에서 큰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원활하게 수업을 마무리 짓고 이제 막 열린 숙소에 들어온다. 급하게 짐을 정리하고 건물 안뜰에서 다음 수업을 진행한다. 순례길 중간중간에 온라인 수업을 해야 한다는 건 번거롭긴 하지만 꽤나 가치 있다. 어느 정도 발걸음을 강제할 수 있고, 여행 자금을 실시간으로 벌 수 있다는 건 꽤나 드문 경험이니까. 매일 글을 연재하면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수업을 하면서 불어를 사용한다. 순례길을 돌면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면서 사용한다. 모든 여정이 끝났을 땐, 나는 4개 국어 사용자일 게 분명하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갈망하는 이유는, 다른 포유류보다 뛰어난 고등 사회 동물이거나 '마음'을 가진 존재여서가 아니다. 유대감의 추구는 다른 포유류와 똑같이 생존에 필요한 진화 방식일 뿐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종종 외로움에 사무칠 때가 있다. 내가 잘못된 건지 생각하다가도, 결국 외로움은 어떤 신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환경 적응과 생존에 요구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다시 괜찮아진다. 때론 이 외로움은 사람을 더 다급하게 만들고, 건강하지 못한 관계여도 괜찮으니 일단 시작하라고 부추긴다. 그 다그침이 삶의 본질에서가 아니라 선천적 본능에서 비롯된, 마치 '목이 마르다' 정도의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다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목이 마른 건 사실이지만 당장 목을 축이겠다고 발 앞에 있는 흙탕물에 고개를 파묻을 필요가 없다고 침착하게 판단할 수 있다.  


사회성이나 사교성이 뛰어나다고 외로움이 반드시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더라도 마음 한 켠 내줄 사람 없는 경우가 있는 반면 거의 홀로 지내는 사람이어도 단 한 명 편하게 대화 나눌 상대가 있다면 외로움은 훨씬 덜하다. 얼마나 외로움을 크게 느끼는지와 얼마나 사교적인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게 사교성이 좋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안정적인 관계라는 단어와 집착은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가. 소셜 네트워크를 여기저기 오다니며 더 많은 관계의 실을 묶으려고 안달 난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 본질에서 크게 멀어진 삶을 사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 끝은 어디일까?



샤워를 마치고 시내를 걷는다. 뜨거운 해를 마주하고 마트에 가는 길이다. 이번 숙소에는 공용 주방이 있기에, 내 몸에 고기를 듬뿍 충천해줄 생각이다. 닭고기 한 팩과 곁들일 채소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다. 고기를 버터에 구워 바삭하게 익힌 뒤, 토마토 파스타를 곁들여 먹을 생각이다. 요리는 항상 즐겁다. 나는 오감을 골고루 사용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요리는 그런 내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독보적인 취미다. 오랜만의 칼질에 더 집중하여 파가 썰리는 소리를 듣고, 손맛을 느낀다. 닭을 굽고 남은 기름에 파를 볶은 뒤 한 쪽에 꺼내 둔다. 남은 기름에 다시 계란을 볶고 토마토소스, 면수, 치킨 스톡을 넣어 소스를 완성한다. 파스타 그릇 위에 닭고기를 원형으로 배치한 뒤, 가운데에 삶은 면을 올리고 그 위로 소스와 볶은 파를 올린다. 내가 한 요리들은 내가 한 요리의 맛이 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떤 재료를 쓰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한 것과 다른, 먹어보면 맛있지만 동시에 너무 익숙한 맛이 난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의 것과 무척 닮아있다.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본질적 외로움도 무시할 수 없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나, 오랜 친구와의 연락,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의 외로움을 해소시켜 줄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이 존재한다. 그 구멍은 당신과 붉은 실로 이어진 인연을 만난다 하여도 메워지지 않으리라. 그것은 당신이 그 누구와도 다른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유성에 대한 부분은 내일 더 얘기해봐야겠다. 결국 외로움이 어떤 미지에서 불쑥 나타난 게 아닌 당연한 (그리고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어떤 외로움들은 고독이라고 이름 붙는다. 급하게 해소할 필요가 없으니, 이 공허를 더 깊이 느끼고 더 안으로 들어가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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