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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승 Jul 22. 2022

21. 죽음과 사후 세계의 전말

산티아고 순례길 사색 여행기

21일 : Sahagun에서 El Burgo Ranero까지 약 20km.


순례길은 중간을 넘어가고 같이 지냈던 사람들과도 찢어지니 하루가 단조롭다. 숙소에 준비된 아침으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길을 나선다. 거리를 줄이는 것보다 생각을 정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무리하지 자고 되뇐다. 어제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프랑스인 그레고리(Ggoire, 프랑스식 발음으론 그헤구아흐)를 마주친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베르사유에서 순례를 시작해서 곧 두 달을 채운다. 집에서부터 시작한 이유가 있냐고 묻자, 그는 순례는 자기 집에서부터 도보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냐고 되물었다. 한국인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나처럼 Saint-Jean-Peid-de-Port에서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이제 막 절반을 지난 거지만, 걸어온 거리로 따졌을 때 그의 순례는 거의 막바지다. 누가 순례를 앞서가고 있는지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한 게 없다. 각자 시작한 날짜와 장소, 체력, 금전 상황, 보폭, 장비와 가방의 무게가 다르다. 무엇보다 순례의 목적도 다르다. 단순히 걷기만 하면 되는 순례조차도 타인과 비교가 불가능한데 아득히 복잡하게 설계된 사람의 인생을 비교하는 것은 정말이지 우습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람의 신체가 존재하는 목적을 밝혔다면,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성격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혔다. 만물의 영장을 상징하는 인류의 두뇌는 신체에서 불필요한 찌꺼기들이 배설되는 두 구멍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무한한 잠재력과 무력한 필멸적 유기체로써의 한계를 동시에 인지하고, 그 아득한 간극 사이 어딘가에 (자신이 인식하는) 현실을 배치하기 위해 성격이라는 갑옷을 만들고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즉, 인간이 각자 다른 성격을 형성하는 이유는 유전적 기질, 환경, 경험의 삼중주를 자신이 믿는 현실에 맞게 재배치시키는 매체로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당연히 여기에도 아무런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무력감의 정점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죽음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두려움의 기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두려울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종종 듣지 않는가? 그래서 죽음을 주제로 다루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너무 두려워해서 죽음을 포장하기 위해 사후세계나 영원의 세계 같은 이야기를 꾸며낸다. 물론 죽음이 존재의 고통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인건 맞다. (정말 유일한 건지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순례길에 오르지 않았나?) 걸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삶을 직시할 때만 보이는 존재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 끔찍한 놈이구나, 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대부분 사람들이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사회적 죽음이다. 사회적인 연결고리가 모두 끊어지는 것. 그 생존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죽음과 동등한 위치에 둘 법도 한데, 오히려 더 무서워한다.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음에도, 자신과 이야기를 공유한 관계가 소멸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어서 그런 걸까?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사회적 연결고리가 살아있다면 다른 사람들 품에서 죽고 자기의 이야기는 남지만, 사회적 고립 속에서 죽으면 아무도 자신을 배웅해주지 못하고 그대로 잊힌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마을에 도착해 그레고리와 함께 아침을 먹는다. 그는 다음 마을까지 갈 생각이지만, 나는 일과 작업을 위해 남아야 한다. 그는 내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번호를 달라고 한다. 속도로 보면 순례길 위에서 다시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파리에서라도 볼 수 있으니 괜찮다. 그를 보내고 오늘 묵을 숙소 근처에 작업하기 좋은 공간을 찾아본다. 여기저기 벤치는 많이 보이지만 아쉽게도 테이블이 없다. 수업은 테이블 없이도 진행할 수 있겠지만, 블루투스 키보드로 글을 쓰다 보니 테이블이 없으면 너무 불편하다. 아무래도 수업을 마치고 입실하기 전까지는 글쓰기에 집중하기 어렵겠다. 점점 숙소 주변에 모여드는 순례자들 때문에, 숙소 관리인에게 입실 시간부터 화상 회의가 있어서 마치고 들어가고 싶으니 한 자리만 비워달라고 요청해본다. (나는 상대방이 먼저 영어를 쓰기 전까지는 번역기를 돌려가면서라도 스페인어로 말한다.) 그는 흔쾌히, 차라리 조금 일찍 입실하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그의 친절 덕분에 조금 더 편안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항상 곁에 두어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바탕인 소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서는 죽음에 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오늘 당신이 대면하게 될 적은 다른 종류입니다. 당신을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장 좋은 동반자가 될 수도 있는 가상의 적이죠.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뒤로,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자각할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지만 과학적으론 틀린 말이기에 (책 '순례자'는 소설이다) 달리 감흥은 없다. 다만 죽음이 가장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완전히 동의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선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슬프고 암울한 색을 걷어내야 한다.


이미 삶의 신비가 깨졌다면 죽음의 공포도 받아들이기 쉽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고,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내일 사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게 통계적으로 극히 드물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봤을 때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사람은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사실 죽음은 항상 당신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당신이 애써 그곳을 보지 않고 살아갈 뿐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직시할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애써 시선을 피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현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뇌는 교묘하게 이유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뇌는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뇌의 주인도 모르도록) 합리화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죽음은 두렵고 회피해야 하는 것.' 그 생각이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고, 두려움에 빠져 도망치는 삶을 살도록 만든다. 결국 방향 없이 여기저기 튕기는 자석의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숙소에서 같이 지내는 순례자들과 간단한 인사 외엔 대화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면 거부감 없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평소의 나는 늘 태블릿으로 일이나 작업을 하고, 혼자서 산책을 하거나 낮잠을 자기 때문에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무표정을 유지한다)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처음 순례길을 시작한 뒤로 친해졌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쭉 혼자 걷는 순례길이었다면 차라리 덜 외로울 텐데. 항상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외로움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외롭다고 느끼는 건, 그 전엔 나를 채워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외로움을 털어내기 위해 다른 순례자들에게 말을 걸고 어울리는 대신, 또 누군가가 나타나 같이 대화를 하게 될 순간을 기적처럼 받아들이자고 다짐한다.


침대에 누우면 보이는 지붕 구조에 나는, 사방에서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니 잠자긴 글렀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종교나 신비를 믿지 않는 내가 사후 세계를 규정하는 방식은 내가 죽음을 직시하고, 친구이자 동반자로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과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다. 영혼을 믿지 않는 만큼, 내가 생각하는 사후 세계는 생명 반응이 중단된 후 우리가 가는 '다음 세계'가 아니다. 최근 뇌파 검사를 하던 한 노인 환자가 검사 도중에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의 검사 도중 사망으로 죽음 임박에서 죽음으로 가는 사이에 뇌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당장 죽어가는 사람'의 뇌를 스캔한 최초의 사례다. 그리고 이 스캔 자료들은 고인의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이 죽기 직전 활성화가 되면서 플래시백(주마등)이 일어났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누군가는 '죽음 임박에서 죽음으로 상태 변화에 대해 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든 기억을 뒤져가면서 해결책을 찾아보는 게 아닐까'라는 도킨스적 추측을 했는데, 나도 이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관찰된 경우는 이번 사건 하나이기에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주마등은 실재한다.


주마등이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 인식될까 고민해보면, 마치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적고 마침표를 찍기 전 앞 내용들을 쭉 훑어보는 것이다. 하나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기승전결이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성 없이, 당신이 죽기 전까지 당신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동안 행복과 불행은 반복되고, 변화와 적응도 반복된다. 때문에 우리는 죽기 전까지 이야기의 결말이 어떤지, 언제 결말이 날지 알 턱이 없다. 그리고 삶은 불현듯이 뒤죽박죽 구성도 흐름도 엉망인 당신의 서사에, 이제 마지막 문장을 적을 차례야,라고 속삭인다. 어떤 문장을 적건, 앞의 서사를 모두 결론지을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이야기는 끝난다. 그 문장을 쓰기 위해 펜을 꺼내 든 그 찰나의 순간이,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이다.


좋은 이야기였다고 결론을 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실수를 하고 살고, 실수를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된다. 따라서 자기 삶에 그렇게 떳떳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마지막 문장을 써야 하는 그 순간에 있다면, '뭐 엄청 멋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라고 적을 수만 있어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내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지옥은 뭘까? 그 순간이 되어서까지도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말줄임표를 꺼내 든 삶이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 와서야 지금까지 기록된 신의 이야기를 통째로 부정하는 미완성의 문장. 그것만큼 끔찍하고 지옥 같은 순간이 어디 있을까? 남들에겐 찰나처럼 보이는 죽음의 과정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사자에겐 영겁의 순간으로 느껴지리라. 삶의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가질 수 있는 최후의 감정이 후회와 한탄이라니, 오히려 영화나 책에 묘사된 불타는 지옥이나 뼈가 시린 지옥은 천국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언제든지 마지막 문장만 남은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내게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언제든 죽음 앞에 떳떳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들은, 설령 죽음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매 순간 내가 내쉬는 숨과, 눈 앞에 놓인 삶을 만끽하도록 만든다. 죽음을 왼쪽 어깨에 태우고 살아가면, 불필요한 두려움 없이 삶을 대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게 내가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다. 국과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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