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든 눕든

애플 비전 프로 3

by 최의택

뭔가를 지르기 전에는 지나치리만큼 숙고하는 편이다. 비전 프로가 한국에 출시했다면 당연히 애플스토어에 가서 직접 써보고 내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지, 정확히 내가 상상한 대로 쓸 수 있을지를 느껴본 뒤에 구매할 생각이었다. 당연하지 않나? 무려 5백만 원에 달하는 기기니까. 그러려고 내가 사는 곳에서 그나마 가까운 하남시의 애플스토어에 대해서도 조사해놨었다. 특별히 접근성에 신경 써서 설계됐다는 그곳은 마구 굴러다니고 싶은 곳이었다(물론 그러면 안 되겠지만).

24년 WWDC에 아시아권 여러 나라들에 출시되면서 한국만 빠졌다는 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함께 공개된 비전OS 2에 한국어가 추가된 것을 고려하면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자들은 애플의 광학 인서트 판매가 우리나라 의료법 위반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수가 들어간 렌즈는 물론 콘택트렌즈를 허가 받은 안경점에서만 팔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해서 조율 중이라 늦어진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어쩌면 애플이 한국 출시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제품이니 가능성 있어 보였다.

글쎄, 아무리 내가 1년여의 시간 동안 관련 정보란 정보는 싸그리 찾아보며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높아져서 질렀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게 합리적인 지름이었을까? 정말로 비전 프로를 써서 글을 더 쉽고 빠르게 쓸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이제 막 작가가 돼 운 좋게 계약 몇 건 따낸 내가 소비해도 될 만큼 정당한 지출인가? 결제 버튼을 누르고 나니 오히려 더 이런 생각들이 날 괴롭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번뇌는 상대적으로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중국 직구도 아니고, 주문한 지 5일 만에 배송이 된 것이다.

토요일이라 집에 있던 아빠를 시켜 박스를 열었다. 나는 유튜브에서나 보던 장면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무슨 명품 농구화 같은 포장 속에서 꺼내든 애플 비전 프로의 영롱한 자태를 보면서도 머릿속에선 이 생각뿐이었다. 제발 내 생각대로이길! 아니면 대체 저걸 어쩐담 말야!

아빠한테 필요한 영상들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아빠, 설정에 들어가야 해. 설정을 바라보고 손가락을 꼬집는 거야. 아빠는 비전 프로를 머리에 썼다. 좀 웃겼다. 헤드셋이라는 플랫폼의 한계였다. 아빠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꼬집어대기 시작했다. 초기 세팅을 해야 했는데 영어로 자꾸 뭔가를 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처럼 시력이 나쁘진 않지만 어쨌든 안경을 쓰는 아빠는 언어적 시각적 장벽 앞에서 앞서 내가 보여준 영상을 참고해 어림짐작으로 단계를 밟아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홈 화면이 나타났다. 그 소리가 나한테도 들렸다. 그때 나도 모르게 탄식했던 것 같다.

이후에는 그나마 쉬웠다. 비전 프로의 시야를 내 아이맥에 미러링해 아빠가 보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설정에 앞서 아빠한테 홈 화면에 보이는 공룡 아이콘을 선택하게 했다. 그것은 애플이 비전 프로 홍보를 위해 가장 주력으로 썼던 가상현실 컨텐츠 앱이었다. 비전 프로를 시연하는 사람들은 통과 의례처럼 그 앱을 실행한다. 앱이 실행되자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왔다.

“아빠, 손가락 들어봐.”

나비는 아빠 손가락 위에 앉았다. 아이맥 화면으로 보니 싱크가 맞지는 않았는데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 앞으로 가상의 창이 열렸다. 나는 아빠 반응이 궁금해서 숨죽였다. 창 너머에서 작은 랩터 한 마리가 아빠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녀석이 좀 더 과감해지려고 할 즈음 갑자기 저쪽에서 쿵, 쿵 하는 발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온다.

거대한 공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냥 딱 보면 위험해 보이는 놈이었다. 전형적인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을 한 놈이 커다란 콧구멍이 보이도록 다가오더니 돌연 쿠와왕 하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넘어오려는 순간, 창이 닫혔다. 유튜브 후기에는 이걸 보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빠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얼굴이 좀 상기된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때? 진짜 같아?”

그때 아빠가 뭐라고 그랬더라? 응이랬나? 볼 만하다고 했던가? 기억에 안 남은 걸 보면 늘 그렇듯 재미없는 대답을 했을 거다.

설정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 화면을 꿰고 있었고 내가 비전 프로를 썼을 때 활용할 수 있을 만한 기능들을 활성화시켰다. 가장 메인으로 쓸 스위치 제어에 내가 쓰는 블루투스 스위치를 페어링하고 액션을 등록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웰 컨트롤과 음성 명령도 켜두었다.

드디어 내 차례였다. 말이 쉽지 그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흘렀다. 긴장했던 탓인지 정작 내가 쓸 때가 되니 몸이 너무 고단했다. 나는 일단 활성화해둔 기능들이 정말로 내 예상대로 작동하는지 정도를 겨우 파악했다. 체력은 떨어졌지, 비전 프로는 무겁지, 조작은 낯설기만 하지… 가상 키보드를 띄워봤지만 도무지 내 시야에서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위치에 떠 있어서 타이핑이 거의 불가능했다. 망했다는 생각을 안고 나는 침대에 쓰러져 잤다.

다음날, 나는 천천히 접근성 기능들의 하위 옵션들을 하나하나 테스트해 보며 조작을 익혀갔다. 드웰 컨트롤로 내가 일정 시간 바라보는 것을 자동으로 선택하는 방식은 가장 쉽기는 했지만 그만큼 실수가 잦고 무엇보다 타이핑을 하기에는 느렸다. 스위치 제어 쪽 기능들을 뒤져보던 나는 한 옵션을 켜고 응? 했다. 아마 소리도 질렀던 것 같다. 이거야!

잠깐 스위치 제어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스위치 제어란 말 그대로 스위치로 터치 인터페이스 장치를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다.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된다. 화면 터치부터 시작해서 스위치 제어를 위해 만들어진 적응형 스위치, 블루투스 키보드나 게임패드, 심지어 소리도 스위치처럼 쓸 수 있다. 그러면 화면에 파란색 격자가 생겨나는데 이 격자가 자동으로 화면의 위에서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에 존재하는 모든 객체 위에서 멈춘다. 내가 원하는 객체 위에 격자가 멈췄을 때 스위치를 트리거한다. 세부 옵션을 적당히 맞춰주면 상당히 쓸 만해진다. 나는 이전부터 이 방식으로 아이패드를 써왔다.

그런데 비전 프로의 스위치 제어 옵션 중에 처음 보는 항목이 있었다. 시스템 포인터. 이게 뭐지? 선택했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다음 옵션을 테스트하기 위해 스위치를 누른 나는 깜짝 놀랐다. 격자가 생겨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황해서 몇 번 더 스위치를 누르는데 때마침 내가 보고 있던 항목 위로 스위치 제어 패널이 떠올랐다. 그 순간 깨달았다. 시스템 포인터. 내 눈. 나는 다른 곳을 보고 스위치를 눌렀다. 오. 또 다른 곳을 보고 스위치를 눌렀다. 오! 가상 키보드를 띄우고 버튼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글이 써졌다. 정확히 내가 상상한 그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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