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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시골에서 배워야 하는 이유

[양평 사람 최승선 035]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by 최승선

자연엔 다양한 종들이 살고 있다. 도시에 살다 보면 지구가 인간의 것이라 생각하게 되지만, 시골에선 인간도 one of them임을 인지하게 된다. 슬프게도 그 인지의 계기는 도로의 사체들이다. 매일 운전을 하다 보면 매주 로드킬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고양이, 고라니뿐 아니라 청설모와 종류 모를 새, 개와 멧돼지들의 고통을 맞닥뜨린다.


성남에서 살 때, 집에서 역으로 가는 길엔 장례식장이 있었다. 출근길이 발인 시간대와 겹쳐 상복을 입은 상주들과 장지로 향하는 버스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했던가. 3일의 손님맞이와 이별의 감각을 지나간 상주들은 상상보다 담담한 태도로 스케줄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건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면 그 위로가 파렴치하게 느껴져, 누군지 모를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 아침 일과였다.


양평으로 이사 온 후에는 동물들의 명복을 빈다. 같은 땅과 하늘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법칙은 공유되지 않아 죽어야 하는 다른 종들에게 가엽기보단 죄책감만 가득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로드킬 당한 사체를 발견했을 때 어디로 전화를 해야 그들이 안전히 죽을 수 있을지 찾아봐야지 생각하지만, 차에서 내릴 때마다 까먹어버리니 그들이 덜 아프게 죽었길 바란다. 언제든 도로교통법을 인지하지 못한 존재가 튀어나올 수 있음을 인지하며 속도를 낮춘다.


'도로교통법을 인지하지 못한 존재'는 비단 야생동물만은 아니다. 아직 면허를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많으니까. 면허가 있다 하더라도 핸들을 잡지 않은 자연인이 도로교통법을 주지할 필요는 없으므로, 모든 보행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캄캄한 밤에 인도도 아닌 갓길에서 어두운 옷을 입고 걷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차선이 없는 차도라고 부르지도, 인도라고 부르지도 않는 도로는 누구라도 튀어나올 수 있다. 시골에선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몰고 있는 자동차가 1톤이 넘는 쇳덩어리라는 걸 인지하기 어렵다. 내 맘대로 뚝딱 멈출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걸 인지하기 어렵다. 걷는 사람은 도로가 차량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정확히는, 차량은 걷는 사람을 주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다. 차의 입장에선 사람이 나타난 거지만, 사람 입장에선 차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그들이 같은 도로를 점유하고 있다.


도시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 차도는 차의 것. 인도는 보행자의 것. 동네는 인간들의 것. 편리하다. 운전자도, 보행자도, 모든 인간들이 편리하다. 그러나 분명 만나는 지점이 있다. 깨닫게 되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어느 것도 인간들의 것이 아니고, 어느 곳도 차량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시설들이 누군가의 공간을 빼앗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지점이 있다.


나는 내가 누구의 자리를 빼앗았는지 알고 싶다. 고라니를 치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내 자동차가 망가질까봐가 아니라, 무고한 생명을 잃게 만들 수 있다는 불안으로 자리 잡아서 속도를 늦추는 사람이고 싶다. 그런 이웃들과 살고 싶다. 양평에 올 땐 생각하지 못했지만, 와서 좋은 이유. 내겐 더 많은 종의 이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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