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산문집

(에세이) 8. 약자가 되자

by 습작생

"아줌마! 마스크 쓰세요!"


금요일, 잠실역으로 향하던 2호선 마지막 열차 첫 번째 칸, 한 남자가 여자를 쏘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흰 셔츠에 회색 넥타이, 쥐색 정장 바지를 차려 입고 검은색 백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40대 초반 남자는 정신 이상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자를 향해 소리 지른 후 혼잣말로 쌍욕을 중얼거리며 씩씩 거렸다. 그 남자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는 내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잠시 빼고 상황을 살폈다. 흥분한 남자가 거슬렸지만, 피곤에 지쳐 동요할 기운은 없었다. 흥분한 수컷을 보면 본능적으로 분출되던 아드레날린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 사건은 계절이 바뀌듯, 때가 되면 한 번씩 겪는 흔한 일인 것 마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남자는 분이 덜 풀렸는지 몇 정거장을 더 가는 내내 욕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분명 자기 화를 삭이지 못하겠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여자를 향해 다시 큰 소리로 입에 담기 힘든 쌍욕을 내뱉었다. 옆에 있던 승객들은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저러다 말겠지란 생각과 그 남자 기에 눌려 애써 외면하기 바빴다.


대중교통에서 마스크를 벗는 행위는 과태료 대상이기 때문에 분명 그 여자가 잘못한 건 맞다. 그러나 일반 시민이 그 잘못을 핑계로 다른 시민을 괴롭히는 건 더 잘 못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불의에 참견할 만큼 오지랖 넓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괜히 말이라도 섞었다가 자기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 정도에서 마무리되면 여자는 속상하겠지만, 아무 일도 없는 일로 끝나게 될 일이다.


전철은 잠실역까지만 운행하는 막차였다. 전철 안 좌석에는 빈자리가 듬성듬성 보일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실역 전에 내렸고, 남아 있는 사람 몇 명만이 종점인 잠실역에서 내리는 듯 보였다. 열차가 잠실역 승강장에 가까워지자 승객들은 출입문으로 향했다. 봉변당한 여자는 출입문 바로 뒤에 섰고, 그 뒤에는 욕하는 남자가 섰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남자 뒤에 서게 됐다. 내 주변에는 남녀 몇 명이 서있었지만 전철 맨 첫 칸이라서 그런지 출입문 중에 사람이 가장 적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핸드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남자는 여자만 들릴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로 쌍욕을 내뱉으며 협박을 했다. 소리는 흐릿했지만, 분명 마스크를 왜 안 쓰냐 쫓아가서 죽이겠다는 식의 말과 입에 담기 힘든 욕이었다. 그 남자 뒤에서 남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던 나는 지쳐있던 몸에 아드레날린이 서서히 분비되는 걸 느꼈다.


출입문이 열리자 여자는 8호선 지하철을 갈아탈 수 있는 오른쪽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 넓은 통로는 철재 셔터가 내려와 들어갈 수 없었다. 여자는 다시 왼쪽으로 몸을 틀어 빠른 걸음으로 그 장소를 벗어나려는 듯했다. 그 남자는 그 여자 몸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며 뒤에서 계속 욕과 협박성 말을 이어갔다. 나는 분노했고 그 남자를 붙잡아 벽으로 밀쳤다. "왜 아무 잘 못도 없는 사람한테 욕을 하세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가 무시하고 가려고 하자 나는 그 남자의 상체를 뒤에서 끌어안아 제압했다. 그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10m 이상 떠나갔다. 옆을 지나가던 몇 안되던 승객 중 일부는 우리를 쳐다봤지만 이내 가던 길로 향했고, 일부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듯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제압당한 그 남자는 씩씩 거리며 놔달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자가 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놓지 않았다. 남자가 나를 위협하면 바로 경찰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공손하게 안 그럴 테니 놔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오히려 기분이 더 언짢아졌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입에 담기 힘든 말을 쏟아 내더니 자신보다 강한 사람한텐 비굴해지는 모습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놓아주자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제야 나는 스마트폰에 지도 어플을 켜서 버스 타는 장소와 시간을 체크할 수 있었다. 10초 정도 어플을 들여다봤을까?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을 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 여자를 다시 뒤쫓았을지 아니면 정말 자신의 갈길을 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내내 기분이 찝찝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다음날에도 분노가 내 온몸에 남아 나를 언짢게 만들었다.


'강약약강'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수직 관계로 조직된 군대를 전역한 뒤 자본주의 논리에 빠진 회사의 녹을 먹고 살아온 내가 단 한 번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위선이다. '강약약강'은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애초에 약자에 대한 '관용'이 없었다. 새로 도달한 지역마다 기존에 살던 동물들을 멸종에 가깝게 몰살했고, 먼 친척뻘인 네안다르탈인도 살육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아도 피부색, 언어, 종교 같은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그런 종에게 강약약강의 논리는 자연스럽게 학습되어 본능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인류는 '인간다움'을 표방하며 스스로 법을 만들고 따른다. 인간의 본능은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이런 행위는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이니깐,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은 여전히 약자를 얕잡아 보거나 괴롭힌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도 약육강식의 논리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는 원시인이다.


언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강약약강에 길들여진 비겁한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면서 신념 하나가 생겼다. '모두에게 약자가 되자'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강자에게 강하지 못한' 이 모습 또한 비겁해 보일지 모르지만, 약자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친절하고 더 상냥해야 한다.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강자, 약자 구분하는데 머리 쓰지 말고 모두에게 겸손한 약자가 되자. 학창 시절 괴롭힘 당하던 친구가 군대 선임 혹은 사회에서 더 큰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 이처럼 강자와 약자는 손바닥 뒤집듯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걸 명심하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에세이) 7.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