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산문집

(에세이) 7.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 (5)

by 습작생

나는 6인 병실에 입원했다. 병원 외관만큼이나 병실은 깔끔하고 깨끗했다. 역시 비싼 만큼 제 값을 하는구나. 병실 입구를 들어서자 왼쪽에는 휠체어 서너 대가 들어가도 충분한 연갈색 미닫이 문이 달린 화장실이 보였고 오른쪽에는 남자 중학생 키만 한 하얀색 냉장고와 세면대가 보였다. 전면으로는 6개의 병상이 보였는데 5개의 병상은 두꺼운 흰색 커튼으로 사방이 가려져 있었다. 나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이 커튼 안에서 스마트폰을 보거나 노트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장실에 가장 가까운 병상 하나만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았다. 간호사가 안내하지 않아도 난 그 자리가 내가 누울 자리라는 걸 단 번에 알았다.


환자용 보행기를 끌고 힘겹게 병상으로 걸어갔다. 화장실이 옆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라서 거동이 불편한 사람한텐 가장 좋은 자리일 수 있겠다고 자위했다. 병상을 커튼으로 둘러치고 매트 위에 올려져 있는 흰색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입고 온을 힘겹게 매트 옆 아이보리색 옷장에 걸고 매트 위에 누워 흰색 아스텍스로 마감된 천장을 바라봤다. 그제야 내가 진실한 환자가 됐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정도는 돼야 누구한테든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다. 여자 친구에게 메시지로 현재 상황을 알렸다. 회사에서 한창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알리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챙겨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퇴근 후에 오겠다는 여자 친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내 자취방에 들러 속옷과 세면도구 같은 것들을 챙겨서 와달라고 말했다. 잠시 후 막내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내 병상에 찾아와 병원 수칙을 안내했다. 점심밥은 식수 인원을 미리 체크하는 데 나를 미리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줄 수 없다는 말도 남겼다. 밥 생각도 없었는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부정할 생각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환자가 된 내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였고 치료를 성실하게 받아서 빨리 나가야겠다는 다짐만 되뇌었다. 점심 식사가 다 끝난 오후, 치료를 받기 위해 2층으로 향했다. 접수처 직원에게 치료 안내를 부탁하자 나를 치료 병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치료 병상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서자 한약방 특유의 건강해지는 냄새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향을 음미하며 안내한 매트로 향했고 힘겹게 신발을 벗고 매트 위에 누웠다. 이윽고 담당 여한의사가 다가와 환자복 상의를 벗고 엎드려 누우라고 말했다. 엎드려 눕자 등에 침이 꽂히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한의원을 즐겨 찾았기 때문에 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지금까지 맞아온 침은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침이라서 전혀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맞고 있는 침은 기존에 맞았던 침과는 사뭇 달랐다. 가장 먼저 얇은 침 수십 개를 내 등에 꽂았다. 얇은 침도 많이 맞으면 아프다는 걸 느낄 때쯤 여한의사가 말했다. "지금 놓는 침은 좀 아플 수 있어요" 기존에 침이 샤프심이었다면 여 한의사가 경고한 침은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필기해서 끝이 뭉뚝해진 연필심 같은 침이었다. "내 등을 뚫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서너 번째 찌를 때는 어금니를 꽉 깨문 치아 틈 사이로 기력 없이 죽어가는 강아지가 내뱉은 약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한의사는 즐기는 게 아닐 거야. 저분도 고통스럽지만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걸 거야.


침을 다 꽂아 넣은 여 한의사는 임무를 완수한 군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늘 있는 일인 것 마냥 대수롭지 않아 했다. 당연하겠지, 나 같은 환자 수십수백은 봤을 테니. 여 한의사는 커튼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침을 다 맞아 냈다는 성취감에 취했다. 전장에서 여러 발의 총알을 맞았지만 살아 돌아온 병사 같았다. 하지만, 성취감은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어차피 나는 전쟁통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병사도 아닌 허리 아파서 걷지 못하는 병신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엎드려서 등에 침을 꽂은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색 밖에 없었다. 병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는 그 어떤 환자들 보다도 담담했는 데 침을 맞고 나니 멍청하게 몸을 놀린 나 자신에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내가 엄살을 부린 건지, 혹은 예민해서 큰 고통을 느낀 건지, 생각에 잠겼을 때 옆 커튼에서 치료받는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에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병원이 좀 아프게 치료하는구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제 발로 걸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갈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즐길 수 없으면 아파라" 마조히스트가 아닌 나는 이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지난날을 반성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니 여자 친구가 왔다. 병원 오는 사람이 뭘 이렇게까지 예쁘게 하고 왔을까? 과잉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다른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의식해서 내 기를 살려주기 위함이겠지. 환자복을 입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침대에 45도로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여자 친구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표정은 연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미가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측은한 눈 빛이었다. 여자 친구한테 초파리 날개만큼도 아픈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초 증후군에 걸린 남자라서 그런 생각을 품은 건 아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을 배려하기 위한 본능이 작동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 류의 감정 표현은 쓸 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공감하려고 해도 당사자만큼 느끼지 못한다. 타인의 아프다는 말은 단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 여자 친구에게만큼은 이런 생각이 쓸 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여자 친구가 진심으로 내 아픔을 공감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인간적인 배려 밖에 없다. 슬픈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병원 생활은 군대 같이 규칙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복도 끝에 위치한 샤워실로 환자용 보행기에 의지해 천천히 걸어간다. 내 병실도 복도 끝이니 병동에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다. 샤워실은 항상 비어있었다. 아침에 샤워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다른 환자들은 샤워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지 도 모른다. 샤워하러 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지만, 샤워하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샤워가 주는 개운함은 내가 병원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퇴원하는 날까지 매일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입었던 속옷과 수건을 손으로 빨았다. 군대에서 매일 했던 일이라 익숙하게 해낼 수 있다. 샤워를 끝내고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환자용 보행기에 의탁해 병실로 돌아온다. 병실로 가는 길 중간에 간호사들이 앉아서 인수인계를 한다. 그 간호사들은 분명 내가 지나가고 나면 내 뒷 담화를 할 것이다. 잘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꼬박꼬박 샤워를 챙기는 모습이 입을 근진 근질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샤워를 마치고 병상에 돌아오면 아침밥이 나온다. 밥은 맛이 없다. 장기가 안 좋은 환자들이 먹을법한 건강한 맛이다. 외상 장애인데 굳이 이렇게 건강한 밥을 줄 필요가 있나 투정을 부리고 싶지만 실행하지 못한다. 밥을 다 먹으면 오전에는 침 치료를 받고 오후에는 도수치료를 받는다. 침 치료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두렵다. 침이 꽂힐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지은 죄들을 떠 올리며,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망상에 잠긴다. 내 인생의 유일한 참회의 기록이다. 치료가 끝나면 병실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도수치료를 받으러 3층으로 내려간다. 도수치료는 침 치료에서 느끼는 통증과 결이 다른 통증을 느끼게 만든다. 아픈 부위를 누르거나 문질러서 마사지하듯 근육을 풀어주는 데 일반인에겐 시원할 것 같은 동작이 나에겐 오로지 고문처럼 느껴졌다. 걷지 못했던 초반에는 시체처럼 누워서 치료를 받았지만, 2주 차부터는 내 몸을 스스로 움직여 치료에 동참했다. 폼롤러나 마사지볼 같은 도구를 이용해 근육이 뭉쳐 경직된 부위들을 풀어주는 동작이었다. 도수치료를 받고 나면 식은땀에 환자복이 약간 젖었다. 흥건히 젖을 정도는 아니어서 적당히 살만했다. 침 치료와 도수치료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도수 치료다. 칼로 찌르는 느낌과 야구 방망이로 맞는 느낌 중 야구방망이로 맞는 느낌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입원한 첫 주, 매일 여자 친구는 나를 보러 왔다. 올 때마다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고 나는 던킨도너츠를 사다 달라고 말했다. 나는 거창한 걸 주문할 만큼 양심 없는 사람이 아니다. 던킨도너츠 정도면 병원에서 먹을 수 있는 그 어떤 음식보다도 가장 위대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면회 시간이 저녁 8시까지라서 여자 친구는 1시간 남짓 머무를 수 있었다. 첫날만 좀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을 뿐 둘째 날부터는 여느 연인들처럼 대화가 오고 갔다. 둘째 주부터는 평일에 오지 말고 주말만 와달라고 부탁했다. 여자 친구 회사에서 병원까지, 또 병원에서 그녀의 집까지 거리도 먼데 매일 오는 게 비 생산적이고 비 효율적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는 전혀 힘들지 않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내가 부탁한 대로 해줄 수 없겠냐고 다시 부탁했고 우리는 주말만 만나기로 약속했다.


병원에 입원한 사실은 여자 친구와 직장 내 같은 팀 동료들만 안다. 내가 그들에게만 알렸기 때문이다. 팀원들이 방문한다고 했을 때 제발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굳이 인사치레로 올 필요 없으니 내 업무 공백이나 잘 메워 달라고 부탁했다. 병원과 회사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예고도 없이 팀원 전체가 찾아왔고 내가 걷지 못하는 모습을 돌고래쇼 관람하듯 지켜봤다.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마음보다 창피한 마음이 컸다. 팀장님은 몸 간수 잘하라며 신사임당 두 장을 건네셨다. 지금은 팀장에서 내려오셔서 같은 팀원으로 계시는 데 평소에는 냉철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면을 가끔 보여주셔서 잘 따르려고 노력한다.


어떤 날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걷는 게 자연스러워서 곧 퇴원할 사람 모습이 보일 때쯤 여자 친구가 나를 다시 측은하게 바라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아픈 사람이 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 원래 아프면 알려야 되는 건가? 하긴 병원에 입원할 정도면 알릴 자격은 갖췄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알린다고 내 병이 더 빨리 낫는 것도 아니고 괜히 사람들에게 근심거리만 얹어주는 게 아닌가? 남한테 알리는 건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는 건데, 나한테 어울리는 방법은 아니었다. 둘러 댈 수 있는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내 대답은 단순했다. "말하기 귀찮아서."

여자 친구는 내가 알리지 않은 게 아니라 알리지 못하는 걸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관점에선 내가 고아나 다름없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리지 않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어머님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자주 떠들어댔던 것처럼 안 좋은 일은 연락을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 입장에선 그게 최고의 효도였다. 여자 친구와 나는 관점의 차이로 고아와 효자의 경계를 마주했다.


섬 하나를 바라보더라도 김훈 작가처럼 '버려진 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떠나버린 섬'으로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외로움은 이런 관점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어떤 사람을 외로운 사람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그 순간 외로운 사람이 돼버린다. 정작 그 사람은 외롭지 않지만, 타인의 관점이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런 관점의 간극 자체가 외로움을 생산해낸 것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에 둘러 쌓인 사람은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 수많은 관계 속에서 생활했지만 항상 소모적인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과 서운함 따위의 감정들 때문에 외로웠다. 지금은 최소한의 관계로 독립적으로 살아가지만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외로움은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많고 깊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사느냐 못 사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자신이 생각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고찰하고 집중해 본다면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끝.-


사족

한 달 만에 퇴원했다. 완쾌해서 퇴원한 건 아니다. 장비에 의지하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쫓기듯 퇴원한 것이다. 퇴원 후에도 한 달간 도수 치료를 받았다.

몸은 많이 망가졌지만,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첫사랑을 겪었던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진리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상처가 난 자리에 성숙이라는 새살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다친 이후로 다행히 운동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은 없다. 운동 후에는 항상 마사지로 근육을 풀어주고 적당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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