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가 전부는 아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과정

by 최환석

요리학교에는 ‘이냐키’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항상 흰 셰프복에 흰 바스크 모자를 쓰고 무표정한 얼굴로 실습실을 가로지르던 그 사람.

선생님은 유독 무서웠고, 또 유독 실력이 뛰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단정했고, 칼질은 정확했다.

실습실 안에서 말 안 듣기로 유명한 학생들조차,

이냐키가 걸어오면 괜히 동작을 멈추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데 이냐키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채식주의자였다.

그것도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큰 병을 겪은 뒤로 식단 전체를 바꿨다고 했다.

요리학교처럼 고기와 생선을 다루는 일이 많은 곳에서는 드문 경우였다.


그런데도 실력은 탁월했고, 감각은 정교했다.

맛을 보지 않고도 정확하게 지시했고,

심지어 동양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나에게 종종 한국에서는 두부를 어떻게 먹는지,

김치를 담그고 싶은데 액젓을 쓰지 않고 발효시킬 수 있는지 등을 물어보곤 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시험을 보게 되었다.

필기시험이라고는 했지만,

단답형이 대부분이고,

마지막엔 레시피를 적는 주관식 문제가 두 개 나온다고 했다.


나는 통과가 목표였다.

고득점은 애초에 욕심도 없었고,

레시피까지 다 외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과감히 포기했다.

그 시간에 교재 전체를 훑으며 이론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시험 당일, 다행히 내가 아는 문제가 대부분 나왔다.

마지막 레시피 문제는 하나만 적고, 하나는 비워둔 채 제출했다.

그래도 전체 점수로는 커트라인은 넘는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시험이 끝난 직후,

이냐키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선생님은 내 시험지를 앞에 두고 말했다.


“너는 불합격이다.”


나는 당황했다.

“왜요? 커트라인은 넘었을 텐데요.”


선생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레시피를 적는 것도 시험의 일부다.

그걸 빠뜨렸다면, 고의든 실수든 합격시킬 수 없다.”


내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나는 나름대로 전략적으로 준비한 건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내가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서 있자, 선생님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점수로는 합격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너는 시험을 통과하려고 학교를 다니는 거냐?
아니면 배움을 네 것으로 만들려고 온 거냐?
과정에 성실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아무 의미 없다.”


순간, 누가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친 것 같았다.


한국에서 자라며 우리는 늘 ‘선택과 집중’을 배웠다.

모르는 건 과감히 버리고, 아는 걸 최대치로 끌어올려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


나는 그 방식대로 움직였고,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선생님은 시험의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나의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실습 수업에서 선생님이 던지는 말 하나,

과정 중에 손이 가는 동작 하나하나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어차피 시험에 안 나오겠지” 하며 넘어갔을 부분도,

“이건 왜 이렇게 하지?” “이건 기억해두자” 하는 식으로

나만의 이유를 붙이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에 재시험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레시피까지 정확히 외워서 갔다.

시험을 마치고 긴장한 채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이냐키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따봉을 했다.

“합격이다.”


그 짧은 손짓 하나에

나는 괜히 울컥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받은 점수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들은 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내게 요리를 처음 가르쳐준 선생님이자,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준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과정을 더 오래 기억하려 애썼고

어떻게든 나만의 언어로 재구성하려 했다.


요리는 시험이 아니었다.

요리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을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든 순간을,

이냐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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