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에야 - 처음 만든 스페인 음식

by 최환석

대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과 다시 학교에 다닌다는 건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것도,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바스크 사람들 사이에서.


바스크 사람들에게 ‘스페인 사람’이라고 부르면

굉장히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런지는 설명하려면

왕국 이야기와 복잡한 역사까지 다뤄야 하는데—

그건 다음 기회로 넘기자.


어쨌든, 학교의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대부분 바스크인이었고

스페인어보다 바스크어가 더 편한 사람들도 많았다.


나중 이야기지만,

한 번은 디저트 수업을 맡던 선생님이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그 기간에 대신 온 선생님은 바스크어만 할 줄 아는 분이었다.


문제는, 반 전체에서 나만 바스크어를 못 한다는 것.


모르는 게 있거나 질문이 생기면

반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함께 선생님께 가서

내가 스페인어로 말하면

그 친구가 선생님에게 바스크어로 옮기고,

선생님이 바스크어로 답하면

다시 그 친구가 나에게 스페인어로 통역해주는—

그야말로 ‘3인 1조 수업’이었다.


또 한 번은 베라(Vera)라는 바스크 시골 마을에서 온 친구가

수업 중 나에게 슬쩍 다가와

“근데 이거… 스페인어로는 뭐라고 해?”

하고 묻기도 했다.

20141003_143137.jpg 산세바스티안 요리학교 Cebanc의 실습 주방. 매일 이곳에서 땀을 흘렸다.

수업은 대부분 4인 1조로 진행됐다.

출석부 기준으로 4명씩 끊어 그룹을 짰는데,

출석부는 알파벳 순으로 된 성씨 기준이었다.

나는 ‘C’로 시작해서 꽤 앞번호였고,

그래서 언제나 앞조에 배정됐다.


실습 수업은 보통 3시간 단위로 이루어졌다.

선생님이 먼저 오늘의 요리를 설명한 뒤,

두세 가지 요리를 직접 시연해 보여줬다.


교재에는 레시피가 있긴 했지만,

단계별 흐름이 아닌 재료와 비율만 간략히 적혀 있었기 때문에,

시연을 놓치면 실습 중에 꽤 많이 헤매게 된다.


그때도 유튜브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널리 쓰이지 않았고

자료도 많지 않던 시절이라,

한 번 놓치면 그대로 끝이었다.


기본적인 칼질 수업만 일주일 가까이 하고,

처음으로 만든 요리는 빠에야(paella)였다.


스페인 요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 메뉴였지만,

정작 산세바스티안에서 빠에야를 식당에서 먹어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빠에야를 전주비빔밥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생각한다.


비빔밥도 한국 가정에서 흔히 먹는 음식이고,

관광객들이 찾는 한식당에서 주로 접할 수 있다.

본고장 전주에 가면 비빔밥 전문 식당들이 모여 있듯이,


빠에야도 스페인 가정에서 보통 일요일 점심에 해 먹는 음식이고,

관광객이 많이 가는 식당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전주처럼 발렌시아에 가면 빠에야 전문 식당들이 많다.


선생님의 물 흐르듯한 빠에야 시연을 보고,

의욕에 가득 찬 우리는 조리기구들이 정리된 곳으로 달려갔다.

각자 필요한 도구들을 챙기고, 요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실습이 시작되자,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순서를 밟아냈지만,

우리는 칼부터 쌀, 육수까지

서로 눈치만 보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나는 일단,

그나마 내가 할 줄 아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양파와 토마토를 열심히 다듬기 시작했다.


서툰 칼질이었지만,

그래도 일주일 내내 연습했던 덕인지

속도는 느려도 결과물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렇게 하나둘,

친구들과 함께 교재를 다시 펼쳐보며 순서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고기와 다른 채소, 새우, 홍합을 손질했고,

다른 친구는 그것들을 팬에 넣고 열심히 볶았다.


그 뒤에 쌀을 넣고 육수를 부은 뒤,

센 불에서 빠르게 끓였다.


친구들은 그래도,

가정에서 빠에야를 만드는 걸 자주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능숙하게 따라갔다.


중간중간 선생님도 다가와

조리 상태를 체크하며,

순서나 불 조절 등을 하나하나 짚어줬다.


쌀과 재료를 넣고 센 불에서 조리하다가

적당히 수분이 날아가고

쌀이 어느 정도 익었다 싶을 때,


깨끗한 천을 덮어 뜸을 들였다.


전기밥솥이 “뜸들이기를 시작합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뜸은 뭘까?’ 했는데,

그게 바로 이런 거였구나.


쌀을 먹는 방식은 달라도,

조리의 원리나 감각은

어딘가 닮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뜸들이기를 마치고 천을 걷어낸 뒤,

레몬이나 계란 등의 데코레이션을 올리고 나니

빠에야는 제법 그럴듯한 모양을 갖췄다.


내 손으로 처음 만들어 본 요리.

신기하기도 했고,

동시에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친구들도 들떠 있었다.

엄마나 할머니 없이

자기 손으로 처음 만들어본 빠에야라서 그랬을까.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요리를 하면 내가 만든 음식은 잘 먹지 않는 편이다.


음식 냄새에 쉽게 질리는 것도 있고,

예전에 일할 때는

같은 음식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간보다가

너무 물려서 토한 적도 있었다.


요리학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친구들은 정말 맛있게 먹었지만,

나는 만들다가 이미 지쳐버리거나,


가끔은 친구들이 식자재를 필요 이상으로 만지는 걸 보고

손이 가지 않아 안 먹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첫 실습이었던 빠에야만은 끝까지 맛있게 먹었다.


사진에 보이는 저 돼지고기도,

사실 냄새가 좀 나서 평소 같았으면 안 먹었을 텐데..


그날 만든 빠에야는,

맛보다도 ‘내가 만들었다’는 감각이 더 오래 남았다.

1402103088880.jpg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 손으로 완성한 첫 빠에야

그날의 레시피 : 빠에야 Paella


재료 (4인 기준)

– 쌀 300g

– 닭고기 or 돼지고기 300g

– 새우, 홍합 등 해산물 적당량

– 양파 1개

– 토마토 2개

– 파프리카 1개

– 마늘 2쪽

– 샤프란 또는 강황 약간

– 치킨스톡 or 해산물 육수 900ml

–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 약간


조리법

1. 양파와 토마토는 잘게 다지고, 나머지 재료도 먹기 좋게 손질한다.

2. 넓은 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고기와 야채, 해산물을 차례로 볶는다.

3. 다진 토마토와 샤프란을 넣고 볶다가 쌀을 넣어 같이 볶는다.

4. 육수를 붓고 센 불에서 끓이다가, 불을 줄이고 수분이 잦아들 때까지 조리한다.

5. 수분이 거의 없어지면 깨끗한 천을 덮고 뜸을 들인다.

6. 천을 걷었을 때 바닥에 누룽지가 살짝 생겼다면, 잘 익은 것이다.


– 필요에 따라 레몬을 뿌려서 먹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레몬 뿌리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9화요리학교 첫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