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는 벌레다!
평소 SF 장르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데,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마주하는 과정이 참담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가 한창 유행일 때 1화를 보다가 중도 포기했다. SF 특성상 초반은 호흡이 약간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토록 어두컴컴한 SF라니. 잔인한 오프닝까지, 나에게는 벽이 너무 높은 작품이라 판단했다.
시간이 좀 흘러 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다시 <삼체>를 시청했다. '제발 봐줘, 제발 봐줘.....!'라는 친구의 말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삼체>에 관한 콘텐츠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열광하고 있었다. 그렇게 재밌다고? 나는 반신반의하며 다시 1화를 틀었고, 그날 시즌 1의 마지막까지 한꺼번에 몰아서 봤다. 그리고 책이 더 재밌다는 말에 한 번 더 놀라며, 살면서 처음으로 무시할 수 없는 두께의 SF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명단 속 물리학자들은 최근 두 달 사이에 차례로 자살했습니다."
창웨이쓰 장군의 말에 왕먀오는 청천벽력을 맞은 듯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리고 그 텅 빈 공간에서 자신이 찍은 흑백 풍경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 대지에서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졌고, 하늘에서 그녀의 눈이 지워졌다. 한 세계가 죽었다.
본문 20페이지
놀랍게도 책과 드라마의 차이점이 꽤 크다. 삼체 문명과 게임, 설정, 주요 장면 등의 굵은 줄기는 같지만 등장인물도 다르고 전개에서 무게를 둔 지점도 차이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기뻤던 것은 다양한 과학 이론이 등장함에도 쉽게 읽힌다는 점이었다. 감정을 긁는 문장이 많았다. 한 세계가 죽었다니.
5명의 절친 과학자들이 삼체 문명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일이 중심인 드라마와 달리, 책 <1부 삼체문제>는 예원제의 이야기를 꽤 많이 보여준다. 물론 드라마도 예원제의 서사를 압축해 잘 보여줬지만 책으로 방대한 이야기를 직접 읽으니 훨씬 몰입이 쉬웠다.
우리 세계에 끼치는 폐해는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기에 정상이거나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행위 중 사악한 것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그런 추론이 그녀를 두렵게 했고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중략)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이 생각이 예원제의 일생을 결정했다.
본문 113-114페이지
드라마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삼체>는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내용도 많이 다루고 있다. 예원제 이야기를 읽으면 그녀가 인간에 대한 회의가 강하며 비관적 관점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예원제는 눈앞에서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배신 등의 시련을 겪으며 인류는 이미 도덕성을 상실했기에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인간, 지구 외 제3의 존재의 억압을 통해 발전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삼체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답에 회신한다.
이곳에 오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이 세계를 얻는 것을 돕겠습니다. 우리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본문 311페이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멸망을 선택한 그날 예원제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일몰과 일출을 짧은 시간 안에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마치 삼체 행성처럼 말이다.
가장 독특한 것은 삼체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삼체인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설명해 주는 장면이 전부였지만 소설에서는 '심판일'호에서 발견한 정보를 통해 그들이 지구에서 신호를 받고 어떤 시간을 지나 기술을 개발하고 우리에게 양성자를 보냈는지 자세하게 보여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1379호 감청원 이야기로 광활한 우주와 그 외로움,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다.
1379호 감청원이 가장 보기 싫은 것이 모니터에서 천천히 이동하는 곡선이었다. (중략) 그는 이 끝없는 곡선이 추상적인 우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줄은 무한히 이어지는 과거이고 다른 한 줄은 무한히 이어지는 미래로, 그리고 중간에는 생명이 없는 불규칙한 기복만 있었다. 높낮이가 들쭉날쭉한 파구는 크기가 제각각인 모래 같았고 곡선 전체는 모래 입자가 길게 늘어서서 생긴 사막 같았다. 황량하고 적막했으며, 참을 수 없을 만큼 길었다.
본문 391페이지
그저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다가오는 외계 문명인에 지나지 않았던 삼체인이 다르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긴 시간 문명의 존망을 기억하는 존재의 지독한 허무함과 공허함을 잘 그려냈다. 그러면 안 되지만, 공감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멸망으로 생존을 위해 감정을 절제한 전체주의 삼체인이 앞으로 과연 어떻게 지구를 점령할지도 많이 궁금하다.
벌레가 된 인류가 과연 반격할 수 있을지, 결의를 다지는 스창, 왕먀오, 딩이와 최후를 맞이하는 예원제의 모습으로 1부는 강력하게 끝이 난다.
2부를 다 읽고 또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