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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Feb 08. 2022

상담 log

선: 제가 하나를 본 게 있는데요. 아마 아무도 빵떡 님한테 말해준 적 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챘을 수도 있어.

빵: 뭔데요?

선: 빵떡 님 처음 방에 들어오면서 인사할 때랑 지금 대화를 좀 나눈 후에랑 빵떡 님 말하는 톤이 달라요. 알고 있었어요?

빵: 아 제가 처음엔 낯을 좀 가려서...

선: 낯 가리는 거랑은 좀 다른데. 저는 빵떡 님이 회사의 리더 급이라고 소개를 받았거든요. 제가 여기 회사 분들 알고 지낸지 6년 정도 됐어요. 그래서 이 회사에서 어떤 사람들을 팀장을 시키는 지 좀 알아요. 똑똑하고 뭐든 잘 해내는 사람을 팀장을 시키는데, 빵떡 님한테 처음 받은 인상은 굉장히 어린 아이 같다, 말투나 제스쳐가. 그래서 '어 뭔가 맞지 않네?'하는 생각을 했어요. 맞아요?

빵: 음... 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선: 근데 또 얘기를 좀 하다 보니까 처음의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은 별로 없어요. 한 마디로, 빵떡 님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모습이 있는 것 같아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 제가 보기에 사람을 대할 때 묘하게 다른 두 가지 모습이 있다는 건 뭔가를 감추려는 거일 때가 많아요. 뭘 감추고 싶어할까? 요거를 좀 생각하면서 얘기 나눠도 좋을 것 같아요. 우선... 빵떡 님은 저를 어떻게 소개 받게 되셨어요?

빵: 아 제가 원래 하던 일이 있었는데, 올해 초부터 다른 역할을.. 팀 리더를 게 되었어요. 큰 팀을 맡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좀 받아서 심해지기 전에 예방 차원에서 상담을 받게 됐어요.

선: 그랬군요. 어떤 것들이 스트레스일까요?

빵: 글쎄요, 아무래도 내 능력 밖의 일을 맡은 것 같고, 잘 해내지 못 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있죠.

선: 아, 두렵군요. 근데 잘 해내지 못하는 게 어때서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빵: 네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럼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고, 창피 당할 것 같으니까.

선: 그게 왜 창피해요?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건데.

빵: 아무래도... 제가 능력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게 되니까.

선: 그게 어떻게 능력이 없다는 걸 증명한다고 생각해요?

빵: 결과물이 좋지 않으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겠죠.

선: 빵떡 님은 어떤 결과물을 내느냐에 따라 빵떡 님의 능력이 좌우된다고 생각하나봐요.

빵: 보통 그렇지 않나요?

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요. 만약에 운동 선수가 빵떡 님 같은 생각을 갖고 산다면 정말 괴로울 거예요. 우승을 못하면, 좋은 성적을 못 내면 능력이 없는 게 되어 버리니까.

빵: 그렇겠네요.

선: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보통 '이건 당연해'라는 생각은 그냥 생기지 않아요. 우리는 다 저마다 작동하는 방식이 있어요. 패턴이 있다고 할까요? 각자 다 다른 알고리즘을 갖고 있어요. 빵떡 님도 빵떡 님이 행동하고, 말하고, '이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패턴이 있을 거예요. 그런 패턴이 생긴 이유는 그게 빵떡 님이 살아가는 데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패턴은 어린 시절에 주로 만들어져요. 어린 시절의 환경에 따라 스스로 생존하기 유리한 패턴을 만드는 거예요. 빵떡 님이 어릴 때 '결과물은 내 능력을 증명하는 거'라는 생각을 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빵: 글쎄요 어릴 때 결과물이랄 거는... 중학생이 되면서 성적을 잘 받았던 것 같아요. 성적이랑 저를 굉장히 동일시했었어요. 모의고사 한 번만 잘 못 봐도 집에서 머리 감으면서 울었어요.

선: 왜 그렇게 성적을 잘 받고 싶었을까요? 초등학생 때는 성적이 어땠어요?

빵: 글쎄요... 그땐 잘 생각이 안 나요. 그냥 중간 정도였던 것 같은데.

선: 그럼 공부 말고 친구들과 관계는 어땠어요? 학교 생활은 어땠어요?

빵: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음... 제가 지금도 좀 살집이 있지만, 그땐 많이 통통했거든요. 그래서 남자애들이 놀렸던 기억이 나요. 그게 제일 큰 기억이네요.

선: 그랬군요, 그런데 누군가 나를 놀리거나 비난해도, 그보다 더 큰 강도로 날 예뻐해주고 위로해주면 부정적인 기억이 상쇄되거든요. 트라우마로 남지 않아요. 어릴 때 빵떡님을 예뻐해준 사람이 있었나요?

빵: 아마 엄마, 아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정도였던 것 같아요.

선: 어떻게 예뻐해주셨어요?

빵: 그게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지금도 저희 부모님이랑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저를 예뻐라 하시거든요. 그래서 추측해 봤을 때 제가 초등학생 때도 예뻐해주셨을 것 같아요.

선: 지금 되게 재미있는 게 뭔 줄 알아요? 기억과 추측은 다른 거예요. 기억은 이성적으로 추측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남는 거예요. 그때 큰 감정을 느꼈다면 기억에 남을 거예요. 놀림 받은 기억이 나는 것처럼, 예쁨 받은 기억도 나야 하는 거예요. 추측하는 게 아니라. 부모님은 모두 자식을 사랑해요. 근데 중요한 건 충분히 느꼈냐는 거지. 본인이 원하는 만큼.

빵: 그렇네요... 예쁨 받은 기억은... 잘 안 나요. 그때의 기억이 전반적으로 다 희미해요.

선: 소아우울이었던 사람들이 어릴 때를 잘 기억을 못해요. 왜냐면 별로 행복한 기억이 없거든. 그래서 그냥 다 덮어버리는 거예요. 나쁜 기억들이랑 다 같이. 빵떡 님도 그랬을 수 있어요. 별로 행복하지 않았을 수 있어.

빵: ...그랬을 수 있겠네요. 그러다 성적을 잘 받으면서부터 놀림에서 좀 벗어난 것 같아요. 엄마, 아빠는 제가 놀림 받은 걸 몰랐을 거예요. 그때는 가족들만 모르면 그냥 없는 일인 척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선: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못하게, 놀리지 못하게 결과물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게 빵떡 님을 보호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빵떡 님 말하는 것도 들어보면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않고 신중하게 골라 말하거든요. 무의식적으로 내 말을 다 포장하고 있는 거야. 말 하나하나도 잘하고 싶거든. 창피당하는 거로부터 보호해야 하거든. 아까 제가 빵떡 님이 뭔가를 감추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잖아요. 보호의 수단은 다양하지만 감추는 것도 보호의 한 수단이거든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뭔가를 감추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거예요

빵: 그런 느낌일까요, 학생 때 밤 새 공부하고도 친구들한테는 '나 공부 별로 못 했어'라고 말하는 심리처럼... 결과물로 증명해야 하지만 사실은 나도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부러 좀 어수룩하게 보이는 거죠. '내가 틀려도 좀 봐줘, 실수해도 비난하지마...'

선: 그럴 수 있죠. 내 능력을 증명하는 게 너무 중요하지만, 사실 그럴 수 없을까봐 무섭기도 하니까. 사실은 어린 아이처럼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싶으니까. 스스로를 보호하는 표현이 그렇게 발현될 수 있죠. 또 빵떡 님의 어린 시절에 강하게 남은 기억이 있어요?

빵: 저희 아빠가 굉장히 다혈질이셨는데... 지금은 안 그러시지만... 제가 어릴 땐 본인이 뭔가 짜증나거나 저랑 동생이 뭘 잘못하면 많이 화를 내셨어요. 문 잠금장치를 부수기도 하고, 동생을 내복바람으로 쫓아내기도 하고. 어디 놀러를 가도 꼭 화낼 일이 생겼어요. 어린 애들이니까... 장난치다 뭘 쏟거나 깨거나 하기 십상이잖아요. 놀러 가면 또 낯선 곳이니까. 그런 일이 자주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굉장히 화를 내셨어요. 그래서 저랑 동생은 여행 가는 걸 지금도 별로 안 좋아해요. 여행 가면 기대보다 어떤 나쁜 상황이 벌어질지 먼저 생각하는데, 그것도 어릴 때 기억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선: 지금은 아빠랑 잘 지내나요?

빵: 아빠랑 잘 못지낸 적은 없어요. 지금은 성질이 많이 죽기도 하셨고.

선: 신기하네요. 아빠가 그렇게 다혈질이셨는데 부딪히는 일이 없었어요?

빵: 부딪히기엔... 아빠가 너무 무서웠어서. 그냥 아빠 화를 돋구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어릴 때 제가 감기에 걸렸는데, 아빠가 기침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래서 하루 종일 기침 참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제가 엄마 아빠한테는 애교가 많은데, 상냥하게 굴면 아빠가 화낼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랬던 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선: 지금 말하는 것도 '보호'랑 좀 이어지네요. 빵떡 님은 알아서 상대방 기분을 맞춰주고 화낼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했네요. 내가 상냥하게 굴면 가족이 다 평온하니까.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다고 많이 말하는데요, 사실 행복은 '싫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거든요. 평생 싫은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뭔가를 하는 거예요. 빵떡 님은 싫은 감정, 아빠의 화를 피하는 방법이 그런 거였던 거죠. 아빠는 빵떡 님한테 예측불가능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언제 화를 낼 지 모르고, 심리적 안정감이 낮은 상대였던 거죠. 그래서 애초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택한 거예요. 혹시 아빠가 화를 내는 상황에서 엄마는 뭘 하고 계셨어요?

빵: 엄마는... 글쎄요, 엄마도 아빠 화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어요.

선: 그럼 엄마도 빵떡 님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그렇죠? 그럼 더더욱 빵떡 님이 스스로와 가족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겠네요. 이러면 엄마한테도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 수 있어요. '엄마는 날 보호해 주지 못해,' '근데 엄마도 불쌍해.'

빵: 제가 심하게 갈등회피형이거든요. 생각해보면 남들은 싸우더라도 할 말은 하고, 그러지 않으면 못 참겠다고 하는데, 저는 참는 게 제일 쉬워요. 참으면 아무 일 없으니까.

선: 그게 빵떡 님의 생존 방식이어온 거예요. 빵떡 님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마음의 패턴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작동하도록 된 거죠. 말 할 때도, 일할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이걸 바꿀 수는 없어요. 빵떡 님은 그런 사람인 거예요. 이걸 뜯어 고치려는 순간 비극이에요. 고치고 말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에요. 나의 모습이에요. 대신 우리는 '아 내가 이래서 지금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구나, 내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이거였구나'를 아니까, 조절할 수는 있어요.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런 나를 데리고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도록 감정들을 조절하는 거죠. 사람이 감정을 억누른다고 평온해지고 좋아지는 게 아니에요. 모든 감정을 내 속에서 느끼면서 그것들을 조절하는 것. 그게 진짜 힘이고 에너지에요.

빵: 저는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요.

선: 빵떡 님 같은 경우 조심해야 할 상황은, 조직이든 어디서든 아빠와 같은 사람, 권위와 힘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두 가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요. 어린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화 낼까봐 전전긍긍하거나, 혹은 나는 이제 어렸을 때의 내가 아니니까 그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거나. 둘 다 조심해야 할 행동이에요.

빵: 저는 주로 전자였던 것 같아요.

선: 조직에서는 참 좋아했겠다. 좋은 결과물 내고 싶어하고, 갈등 일으키지 않고 알아서 배려하고. 어떻게 리더까지 했는지 알겠다.

빵: 저는 그냥 제가 적응을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선: 맞아요. 적응이 별건가요. 나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상황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거예요 나의 패턴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패턴을 갖고 있어요. 그건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어요. 근데 이제 리더를 하게 되면 힘들 수 있겠죠. 문제 상황에 자주 맞닥뜨리는데 그때마다 나와 조직을 보호하려고 하면 에너지가 너무 많이 쓰이니까. 그럴 땐 '내가 또 보호에 에너지를 많이 쓰고 있구나'를 인식하고 조절해볼 수 있겠죠. 나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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