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깔짝깔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Mar 03. 2022

2022년 2월 일기 모음

2/3

모순된 정보들을 큰 혼란 없이 받아들일 때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이게 맞는데 동시에 반대되는 저것도 맞을 수 있고 사실은 둘 다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에 놀라지 않고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게 되는 때에.


2/5

누군가 아주 어린 아이가 되면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할 것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화분을 깨고 두루마리 휴지를 온 바닥에 굴리고 유성 매직으로 삼성과 LG를 오가며 모든 가전에 흔적을 남기고 이불을 케요네즈 범벅으로 만들고... 그리고 청소년기가 된다면 뒤집어지는 사춘기를 보낼 거다. 한 명 이상의 어른에게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꼭 듣는 것을 목표로. 나는 이 욕망들이 언젠가 나의 사회적 입장이나 역할을 무시하고 발현될까봐 무서우면서도 한 편으론 은근하게 기다려진다.


2/10

"열심히 산 지 얼마나 됐어요?"

"네? 글쎄요... 처음 회사 들어와서 열심히 하고... 좀 적응된 후엔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다가.. 직무나 역할이 바뀌면 또 열심히 하고... 회사 들어오기 전에도 취업 준비 열심히 했죠. 꾸준히 열심히 산 것 같아요."

"사람들은 늘 열심히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난 열심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안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하되 막 힘을 쥐어짜내가며 최선을 다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컨대 밥을 매일 열심히 먹는다고 생각해봐요. 최선을 다해 숨을 쉰다고 생각해봐요. 이상하잖아요.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기가 있지만, 그 시기가 길어지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열심히 하는 게 디폴트가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게 디폴트가 돼야 해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인생을 제대로 안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냥 해도 배우는 게 있어요. 인생 망하지 않아요. 오히려 항상 최선을 다하면 뭔가를 하기 전에 겁이 날 거예요. 새롭거나 부담스러운 일일수록. 저걸 어떻게 최선을 다해 잘 해내지? 그 생각에 겁이 나는 거예요. 그냥 한다고 생각하면 별로 겁날 것도 없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열심히 할 것 같은 마음이 들면 자제하려고 한다.


2/13

2월은 내게 깔딱고개다. 충분히 추웠던 것 같은데 여전히 춥고, 황량하고, 크리스마스나 설, 내 생일 같은 이벤트도 다 지나고, 회색 속에서 웅크리고 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2월에도 어떤 공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공기는 곧 녹을 듯 습기가 차있고 진한 이끼 냄새가 난다. 나는 마음이 이상해진다. 그 공기는 나를 10살의 2월로, 고3의 2월로, 25살의 2월로 데려간다. 그 많은 2월들이 겹쳐지며 아쉽고 조금 슬프고 많이 그리운 기분이 든다.


2/14

욕은 좋다.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100번 다짐하는 것보다 "이 쒸이이발 아주 개 같은 거 '금방 하면 되잖아요'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그 '금방 하면 되는' 일이 지금 삼천오백 개 정도 있으니까 그만 재촉해 족 같은 거..."라고 크게 외치는 것이 낫다. 후련하고 금방 차분히 일에 집중할 수 있다.


2/15

잘하고 싶고, 못하기 싫고,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 그 마음들끼리 갈등을 빚어 혼란한 하루였다.


2/17

나는 어릴 때 효석의 약점을 노트에 적어서 "물 안 떠다 주면 엄마한테 이거이거 이를 거야"라며 대단히 체계적으로 사람 열받게 하곤 했다. 난 언제부터 효석에게 깝죽거리지 않게 됐을까. 생각해보니, 굳이 서로가 아니어도 각자가 충분히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후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만은 스트레스가 되지 말자고 생각한 후인 듯하다.


2/20

주말에 본가에 내려갔다. 머리 감고 세수하고 거실에 앉아있었다. 아빠가 지나가면서 "에휴, 주말이라도 좀 씻지"라고 했다. 씻은 건데... 서럽다.


2/21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서 발췌한 내용

- 자존감이 낮았다가 높아진 사람을 분석했더니 4가지가 있었어요. 첫째 지성, 합리적인 정보로 쌓은 분별력이죠. 둘째 도덕성. 남이 보기에도 괜찮고 스스로도 정직하게 느낍니다. 셋째 긍정정서. 의식적으로 네거티브를 덮을 수 있는 좋은 기억을 많이 쌓아요. 넷째 자기조절력. 인내와 몰입으로 작은 성취를 끌어냅니다. 이 4가지는 노력하면 길러지는 것들이에요.

- "나는 괜찮다"가 아니라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로 바꿔야 해요.


2/25

오늘 소리에게 그만두겠다고 했다.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했다. 소리는 내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음, 절대 안돼"라고 했다. 나는 그 감미로운 거절에 살짝 욱했다. 아니 내가 나가겠다는데 무슨 명분으로 안된다는 거야...? 나는 허락이 아니라 통보를 한 건데. 하지만 그런 생각과 별개로 나는 "나가게 해달라", "그만두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내가 이 회사를 나갈 때 승인을 받아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소리라는 생각은 들었다. 나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그녀겠다...

사무실로 돌아가며 '이 회사의 속속들이와 지독히 얽혀버렸구나' 생각했다. 전 애인들과 헤어질 때도 주로 이랬던 것 같다. 헤어지자고 말하지만 어떤 이유로 헤어지지 못한다. 그들이 화려한 언변으로 날 설득했다기보다 애초에 내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힘들다'와 '헤어지자'를 분간하지 않고 말하기도 했기 때문에 상대가 잡으면 주로 잡혔다.

소리는 3개월만 더 다녀보라고 했다.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3개월만 더 다니라고 했다. 그럼 그때도 여전히 그만두고 싶을 수도 있고, 상황이 바뀌어 더는 힘들지 않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때면 뭔가가 지나가 있을 것이다. 그때 결정해라. 가장 나쁜 순간에 뭔가를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든 순간이 지나가는 경험도 했으면 좋겠다.

고민이나 어려움은 사람보다 종이나 노트북 화면과 나누는 게 익숙한 나여서 그 순간이 낯설었다. 동시에 따뜻해서, 그 낯선 따뜻함 속에 별 말 없이 울다가 돌아왔다.


2/26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던 중에 교보문고 바닥에 적힌 글귀를 봤다. '나라는 식물을 길러보았다' 정도의 내용이었다. 내가 만약 내 식물이라면 아마 이렇게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 물을 주고 적당히 햇빛을 쪼이고 때 되면 분갈이를 해주고. 계속 들여다보진 못해도 심하게 굴진 않았을 것이다.

집에 와 효석에게 이 얘길 했다. 효석은 아몬드 개수를 정확히 세어 먹으며 말했다.

"나는 진화가 아니라 '여화'라고 생각해. '남을 여'자 써서. 살기 가장 좋은, 최적의 조건을 가진 놈 하나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냥 남은 놈들이 계속 살아가는 거야. 나무늘보 봐. 그게 어디 살아남기 최적의 조건이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런 놈도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남은 놈들이 이제까지 사는 거야. 그러니까 막 너무 열심히 안 살아도 돼."


2/27

어떤 사람의 '선망하지만 이루지 못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좌우명을 물어보면 된다. 어떤 문장을 늘 곁에 두고 생각한다는 건 그렇게 살고 싶지만, 뜻대로 안 돼서 계속 상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 '용감한 사람은 바보 같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책상에 붙여 놓았다면 그 사람은 바보 같은 질문을 할까봐 늘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내 좌우명은 '마지막에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인 줄 알았는데 자주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이다. 나는 늘 마지막에 웃지 못할까봐 지금 웃지 못한다.


2/28

세상에는 나쁜 일이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나쁜 일이라기보다 '이쪽에서 볼 때는 나쁘지만 저쪽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일'이 대부분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의 일들이 보통 그런 식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이쪽에서만 보던 일을 저쪽으로 끌고가 다시 보게 해준다. 그런 식으로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게 되고, 덜 단정적이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수용하게 되고, 여지를 열어 놓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플 때 보려고 만든 웃음지뢰 모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