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깔짝깔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Apr 07. 2022

2022년 3월 일기 모음

3/5

아빠는 젊은 시절 명절마다 부모님께 빳빳한 신권으로 용돈을 드리기 위해 이 은행 저 은행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나는 80년대 거리를 분주히 다니는 20대의 아빠를 상상하게 된다. 상상 속 아빠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몇 군데의 은행을 돌아다닌 끝에 결국 신권을 구한다. 그리고 신권만큼 빳빳한 흰 봉투에 용돈을 고이 넣는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 것을 굳이 그렇게 하는 아빠의 고집과 정성을 생각한다. 실은 나를 키운 마음의 8할일 그 마음을 이해해보려 한다.


3/10

무엇을 얼마나 두려워하든, 실제는 내 상상보다 훨씬 괜찮다. 그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정말 큰 일은 예고 없이 닥치기 때문에 두려워할 틈이 없다.)


나는 늘 '이렇게 두려운 걸 왜 해야 하지?' 질문한다. 하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두려워할 일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돼야 한다. 실제보다 부풀려진 그림자를 보고 겁을 먹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난을 받아서 두려운 게 아니라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이런 얘기를 속닥거려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이 0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 10점 만점에 2~3점 정도는 안고 가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쬐끔 괜찮아진다. 두려운 시기는 싸워 이겨내는 게 아니라 흘려보내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또 쬐끔 더 괜찮아진다.


3/14

요즘 넷플릭스에서 나오는 드라마는 주로 시즌제다. 그래서 옛날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지 않고 다음 시즌을 위해 늘 여지를 남겨둔다. 완전히 끝이 아니고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다는 식으로.


그런 결말은 내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한다. 전엔 보던 드라마가 끝나면 '주인공들은 현실에 있는 나를 두고 어디로 갔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한창 드라마를 볼 때는 주인공들이 어디선가 우당탕탕하며 살고 있을 것 같은데, 드라마가 끝나면, 저들은 틀림없이 행복할 결말 속으로 사라지고, 난 여전히 끝을 모르는 이곳에 남겨진 것 같아 며칠 우울하곤 했다.


하지만 시즌제는 다른 사건이 벌어지거나 다른 빌런이 나타날 것을 기약해주기 때문에 '너희도 여전히 거기 있구나' 하는 위안을 받는다. 별 게 다 슬프고 별 거에 다 위안을 받아서 살기가 피곤하다.


3/19

시작은 유튜브 영상 몇 개였다. '춤을 꽤 잘 추네... 많이 잘 추네..' '팔다리가 어떻게 저렇게 길고 굵지..' '피부는 왜 저렇게 뽀얄까. 성인 남자가 저렇게까지 뽀얄 수 있나...' '저 집 어머니는 좋겠다. 저런 아들 있어서... 내 아들이었으면 잡채에 갈비찜까지 쌉가능이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 시간 동안 문빈이 나온 뮤비와 릴스와 쇼츠와 예능과 드라마와 직캠을 들여다봤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침대에 모로 누워 '문빈', '아스트로 문빈'을 검색했다. 이 모든 과정은 나의 대뇌피질을 거치지 않고 교감신경과 운동신경끼리의 합의만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그랬다는 얘기다.


4일 째 되는 날, 문빈이 속한 아스트로 전원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입덕..?'


누가 BTS가 몇 명이냐고 물어봐서 "다섯 명..?"이라고 했다가 미개인 취급을 받던 나로서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내 모습이 대단히 낯설었다. 하지만 낯설든 말든 내 손과 눈은 문빈의 '호랑이'와 'bad idea'를 이미 300번 정도 보고 있었다.


스스로 느낀 변화 중 하나는 음악 프로그램의 카메라 앵글을 의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안무에서는 풀샷을.. 풀샷을 잡아야 하는데?' '지금 스텝이 보여야 멋있는데...' '빈이 얼굴이 몇 번 안 나왔네'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무대 영상을 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쇼챔이 제일 앵글을 잘 잡는 것 같다.)


아스트로 웃긴 모먼트 영상들도 굉장히 좋아한다. 팀 전반적으로 텐션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보고 있으면 나도 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아스트로 다 나오는 예능 없지..?' '왜 나는 아스트로 없지..? 아스트로 줘요...' 아스트로가 6년 넘게 활동했는데, 팀원들끼리 저렇게 사이가 좋으니까 오래 활동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전에는 아이돌을 보면서 '왜 다 같이 노래 부르고 다 같이 춤추는데 메인 보컬이랑 메인 댄서 같은 게 나눠져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크나큰 무지였다. 각자 잘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역할이 나뉘는 것이다. 우리 라키는 춤을 잘 추고.. 우리 MJ는 노래를 잘 하고... 산하는 귀엽고... 은우는 잘생겼고... 진진은 랩을 잘 하고... 빈이는 다 잘하고.. 어쩜 이렇게 노래 잘하는 애 춤 잘 추는 애 한 데 모아다가 환상적인 팀을 만들었을까... 나는 "우리 애들이 천잰가봐요"하고 다니는 흥분한 학부모처럼 효석을 잡고 이런저런 영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효석은 "어쩌라고..."라는 반응을 보여, 과거 아이돌 얘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무관심했던 스스로를 반성케 했다.


그러다 문득 '이 어린 친구들은 6년 넘게 열심히 해가지구 이제 성장캐 실력캐가 다 되구 서로 사이도 좋고 재미있게 사는구나 나도 잘 살아봐야지' 생각이 들며, '덕질이 이토록 엔도르핀을 돌게 하며 이토록 삶에 영감을 주는 일이구나!' 깨닫게 되었다. 깨달은 기념으로 직캠을 한 번 더 봐야겠다.


3/23

나는 어릴 때 희미하게 사이코패스 같은 학생이었다. 매사에 장난을 치고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친구들을 보며 '저럴 시간에 공부를 더 해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미의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걸 쫓는 사람들이 부럽다. 저렇게 살면 다음 날에도 살고 싶고 또 살고 싶고 계속 살고 싶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3/26

'내 강점을 가장 잘 발휘하는 일이 뭘까? 내가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나?'를 계속 생각하지만 희뜩한 답을 찾지 못한 세월이 여러 해다. 답을 찾지 못할 때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몰입해서 해도 될까말까 한 일인데 자꾸 주춤거린다.


그래서 최근엔 좀 다르게 생각해봤다. '이 일이 내 체질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체질에 안 맞는 것치곤 잘하고 있다.' 그럼 또 아주 안 맞는 일을 하고 있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이밍의 중요성.


3/27

언덕에서 혹은 방파제에서 그 외에 한적한 아무 곳에서 '나'는 날 기다린다. '나'는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날 바라본다. 나는 '나'의 옆에 앉는다. 우리는 저녁 노을 혹은 바다를 본다. 아무런 생산도 나아감도 없이 몇 시간이 흐르고 '나'는 입을 연다. "왜 왔는지 알아." 그래 아마 알 것이다. 내가 '나'를 찾을 땐 늘 비슷한 경우니까.


'나'가 하는 얘기란 주로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것이다. 성공해도 괜찮고 망해도 괜찮고 예뻐도 괜찮고 못나도 괜찮고 상처받아도 괜찮고 상처를 줘도 괜찮고 어려도 괜찮고 나이가 많아도 괜찮고 잘해도 괜찮고 못해도 괜찮고 실수해도 괜찮고 실수를 안 해도 괜찮고 욕을 먹어도 괜찮고 욕을 좀 해도 괜찮고 돈이 많아도 괜찮고 돈이 적어도 괜찮고 질투해도 괜찮고 질투를 받아도 괜찮고 힘들어도 괜찮고 힘들지 않아도 괜찮고 최선을 다했어도 괜찮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도 괜찮고 즐거워도 괜찮고 즐겁지 않아도 괜찮고 사교적이어도 괜찮고 그렇지 못해도 괜찮고 똑똑해도 괜찮고 멍청해도 괜찮고 다 그런 대로 괜찮다는 이야기.


그런 얘기는 뻔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나를 떠올린다. 성공했던 나 망했던 나 예쁜 나 못난 나 상처받은 나 상처를 주는 나 어린 나 나이가 많은 나 잘하는 나 못하는 나 실수하는 나 실수하지 않는 나 욕을 먹는 나 욕을 하는 나 돈이 많은 나 돈이 적은 나 질투하는 나 질투를 받는 나 힘든 나 힘들지 않은 나 최선을 다하는 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나 즐거운 나 즐겁지 않은 나 사교적인 나 그렇지 못한 나 똑똑한 나 멍청한 나... 그리고 그 뒤로 따라오는 '괜찮고'라는 느린 발음에 맞춰 나를 용서한다. 그런 뻔하고 지루한 과정 속에서 미세하지만 조금씩 스스로를 덜 싫어하게 된다.


'나'는 언젠가 읽었던 우주 이야기와 어떤 철학자의 이야기와 소설과 시가 조금씩 섞여 만들어졌다. 이야기를 마친 '나'는 "여기 오래 있지마" 하고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간결하지만 강하게 내 등을 민다. 그럼 난 세상으로 다시 던져진다.


3/30

오늘도 아주 길고 구체적으로 걱정을 했다. 몇 시간이고 걱정만 할 수 있는 스스로가 신기하다. 걱정 오래 하기 대회 같은 게 있다면 사양말고 출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걱정이 긴 사람의 단점은 걱정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스스로가 싫어져서 또 걱정을 한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를 아시는지. 술 마시는 게 창피하고, 창피해서 술을 마시는. 전에는 어린 왕자에게 공감이 됐는데 이제 술주정뱅이에게 공감이 된다.


나처럼 걱정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는 활동은 글쓰기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걱정하는 동시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소재로 걱정거리를 쓰면 되고, 그럼 비슷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공감해준다. 그럼 위로도 된다. 걱정거리를 글로 쓰면 걱정이 나와 분리되면서 객관화가 되기도 한다. 나는 나고 걱정은 걱정인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2022년 2월 일기 모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