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로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Sep 01. 2022

무주행 (하)

무주행(상)에 이어...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다. 씻고 에어컨 아래 나란히 누웠다. 이 온도, 습도, 나른함... 앞으로 세 시간 동안 누워만 있겠다고 결연히 다짐했다. 이 와중에도 구짱은 바지런히 저녁 메뉴를 골랐다.

  "우리 가게에서 보쌈 포장해올까?"

  "어 좋아~"

  "치킨... 보다는 회 어때?

  "어 좋아~"

  "아까 성심당에서 튀김소보로랑 부추빵 사왔는데 그것도 같이 먹을까?"

  "어 좋아~"

이끼를 뜯어 먹자고 해도 어 좋아~ 라고 할 놈들이었다. 다들 회사에서 의견 내는 데 너무 시달린 탓일까. 인간에게는 '고정 의견량'이 있는데 그것을 회사에서 다 써버린 것이다. 주관이나 줏대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결국 구짱이 차를 타고 한 바퀴 돌며 보쌈과 회를 포장해 오고 그 외 다른 먹을 거리도 편의점에서 사오기로 했다.

  "같이 갈 사람~"

형이는 엄지와 검지 발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쑤셨다. 나보고 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굳건히 참았다. 결국 윤니가 구짱과 가기로 했다. 근데 형이는 무슨 발가락 힘이 이리도 센 것일까. 발가락으로 벤치프레스라도 하는 것일까. 구짱과 윤니가 나간 후 얼마간 나와 형이와 라니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란히 누워있었다.

  "더우니까 좀 떨어져..."

  "...시러..."

우리는 넓은 방 놔두고 이불 더미 주변에 옹기종기 누워있었다. 심심해진 우리는 라니의 사진첩을 구경했다.

  "아쉽게도 2015년 사진부터밖에 없네."

7년 전 사진까지 갖고 있으면서 어느 부분이 아쉽다는 걸까. 라니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서기관을 했을 사람이다. 할 수만 있다면 친구들의 돌잡이 사진부터도 갖고 있으려 한다. 핸드폰을 바꿀 때마다 모든 사진을 날려버리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내겐 없는 내 사진을 갖고 있는 저 놈이 종종 위험하게 느껴진다. 라니의 핸드폰 속 나는 달리거나 울거나 웃거나 누워있거나 잔다. 라니는 그런 사진을 찍어 내 눈 앞에 들이밀고 반응을 관찰하는 사이코패스다. 그럼 나는 "이런 걸 왜 찍어~"라고 앙탈을 부린다. 하지만 뒤에 가서는 웃긴 사진을 골라 인스타에 올리고 흐뭇해한다. 나와 형이와 라니는 누운채 대가리를 모아 라니 핸드폰을 들여다 봤다. 한강에 후드티 맞춰 입고 놀러 간 사진, 노량진에서 술 마신 사진, 오이도에 간 사진, 연말 파티 사진, 생일파티 사진... 보고있자니 10년 간 뭘 같이 많이 했구나 싶었다. 어쩐지 같이 있는데 하나도 안 불편하고 가족보다 편하더라. 이 정도 기간 동안 이 정도로 이것저것 하면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편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방귀만 트면 장까지 편안해질 것이다.


곧 윤니와 구짱이 도착했다. 윤니는 오자마자 보고 들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말해주었다.

  "아니 술을 사러 편의점에 가는데 구짱이 가까운 데 안 가고 저어기 세븐일레븐까지 가는 거야. 거기가 구짱 큰외삼촌이 하는 편의점이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회는 구짱 고모부 가게에서 떠왔고, 내일은 구짱 아는 언니가 하는 카페에 가자고 하더라고. 구짱이 마을 유지 정도 되는 거 아닐까?"

윤니는 장을 봐오랬더니 구짱 생가 투어를 하고 온 듯했다. 우리는 이곳이 구짱 씨족 사회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구짱의 걸음걸이가 마을 이장, 아니 군수의 그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에헴, 이라고 한 번 해주면 모든 퍼즐이 완성될 텐데. 우리는 구짱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회와 보쌈을 다 먹어갈 때쯤 우리는 어우 슬슬 배부르네, 그러게 배부르다 같은 소리를 했다. 하지만 사다 놓은 튀김소보로와 명란바게트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걸 주섬주섬 먹으며 형이가 "모자르면 말해, 라면 끓여 줄게"라고 했다. 우리는 손사래, 필요하다면 발사래까지 치며 절대 못 먹는다고 했다. 두 시간 후 우리는 라면을 먹고 있었다. 라니는 호로록쫍쫍 라면을 먹으며 말했다.

  "빵떡아 너는 어떤 사람 만나고 싶은데?"

  "나는... 나는 말을 다정하게 하는 사람."

  "그러면 만약에 말은 엄청 다정하게 하는데 너한테 매월 200만 원씩 뜯어가는 사람이면?"

이 새끼 또 시작이었다. 라니는 "만약에~라면?"이라는 if절 하나로 사람 개거품 무는 꼴을 보는 사람이다. 예컨대 어깨 넓은 사람이 좋다고 하면 "만약에 문도 못 지나갈 정도로 어깨가 넓은데 얼굴은 주먹만하면? 비유가 아니라 진짜 리터럴리 주먹만하면?"이라고 하는 식이다. 듣는 사람이 열받을 수록 희열을 느낀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형이는 남자친구 잘 만나고 있니?"

  "응 나는 조만간 엄마한테 남자친구 소개해주려고."

  "오 생각보다 전개가 빠르네"

  "그게 내가 사주를 봤는데 23년, 27년에 결혼운이 들어와 있대. 23년이면 내년이잖아? 그래서 빨리 진행해야 돼. 안 그러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구."

나는 현대 지식인다운 의사결정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윤니는 왜 결혼을 타임어택으로 하냐며 조급해하지 말라고 형이를 말렸다. 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유부녀가 된 윤니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문득 나는 여기서 나만 애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슬라이스 햄을 데워 먹는 게 맛있을까 그냥 먹는 게 맛있을까를 고민하는 동안 내 친구들은 결혼과 자녀 등에 대해 고민했구나. 나는 슬라이스 햄처럼 납작하고 축 처진 기분이 되었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산책을 가자고 했다. 나는 호기롭게 일어섰다. 그리고, 그리고... 기억이 없다.


눈 뜨니 나란히 정렬된 이부자리 위에서 모두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큰 사고를 친 것 같진 않아 다행이었다. 좀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우욱"

바로 다시 머리를 들었다. 안되겠다. 그냥 서서 샤워를 하자. 씻고 나오니 다른 애들도 꿈틀꿈틀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어제 나의 행적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역시나 라니의 핸드폰에 모두 저장돼 있었다. 산책 나가서 찍은 사진은 흡사 전통놀이 한마당이었다. 나와 형이가 청도 소싸움을 하고 있었고 나와 윤니는 계주를 하고 있었다. 설명을 들으니 내가 형이한테 어부바를 하려고 시도했고 그러다 갑자기 막 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엎어질까봐 걱정된 윤니가 총총 뛰어와서 숙소로 연행해갔다고 한다. 그랬구나... 그랬어...

  "숙소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잔 거야?"

  "니가 설거지도 하고 구짱한테 칫솔도 빌려줬어"

나이가 들면 취한 자아도 사회화가 되는 것일까. 취한 와중에도 이런 미담을 생성하다니.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뿌듯해졌다. 윤니는 이어서 말했다.

  "아 그리고 형이한테 암바를 하고 라니한테 넥슬라이스를 갈겼지 뭐야!"

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윤니가 친절한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더 상세히 말해줄까봐 얼른 자리를 떴다.


우리는 숙소를 나와 구짱 부모님 가게로 갔다. 구짱이 능이버섯국밥과 표고버섯국밥 다섯 개를 미리 주문해 놓았다. 우리는 몇 시간 전까지 술과 안주를 밀어 넣던 위장을 붙잡고 "어휴 먹을 수 있을까..."하는 말을 반복하며 가게에 들어갔다. 앉아 있으니 보글보글 소리가 들리고 장류의 냄새, 그 장류가 멸치 육수와 채소를 만나 끓는 냄새가 났다. 그 순간 내 위장에서 대이동이 벌어짐을 느꼈다. 위장 세포들이 "야, 먹을 거 들어오나보다! 자리비워!"라고 외치며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제 들어간 보쌈과 회도 합심하여 "여기 자리있어요!"라고 꾸룩꾸룩 외쳤다. 먹을 수 없다는 자기 의심이 먹을 수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국밥이 나오자 다른 애들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이게 들어가네..."

향긋한 버섯향 국밥은 술술 들어갔다. 국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어제 그렇게 술을 마셨구나... 우리는 밥 한 공기씩 뚝딱 하고 나왔다. 잠시 배를 문지르며 서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어떤 아저씨가 "이봐요!"라며 우릴 향해 걸어왔다. 좁혀진 미간의 거리, 씩씩거리는 템포, 부라린 눈동자의 강도를 보았을 때 이것은... 주차 문제다.

  "차를 이렇게 세우시면 어떡해요!"

역시... 우리는 어제의 데자뷰처럼 길 잃은 오리들 마냥 구짱을 찾기 시작했다. 언니... 어디쒀 엉니...

  "무슨 일이신데요?"

새끼들의 울음을 들은 어미처럼 구짱이 가게에서 호다닥 나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구짱을 보자마자 아저씨의 미간과 호흡과 눈동자가 온화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이 집 따님이에요?"

  "네, 그런데요."

뒤이어 구짱의 어머니까지 "무슨 일인데!"하며 나오자 아저씨의 인상은 선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풀어져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모!"하고 사라지셨다. 다시금 구짱 지역 유지설에 불이 붙었다. 나는 잠깐이나마 권력의 달콤함을 찍먹한 기분이었다. 구짱은 포스를 줄줄 흘리며 우리를 차에 태웠다. 암, 타라면 타야지요.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구짱 아는 언니가 하는 카페였다. 직장인의 삼대 영양소인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 중 카페인을 채울 생각에 다섯 명의 카페인 중독자들은 행복해졌다.

  "막 진짜 이게 아이쓰 아메리카노다 할 정도로 시워~언한, 관자놀이가 막 뻐근하고 어금니가 후들거리는 마 이게 아이쓰다! 하게 시워어~~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부탁해."

  "알았으니까 적당히 해."

  "웅"

  "혹시 카페 갔다가 또 가고 싶은 데 있어? 차 시간 전까지 여유 좀 있으니까 말해."

  "아니야, 구짱 피곤하잖아..."

사실 피곤한 건 우리였다. 구짱은 일정을 촘촘히 짜지 않아 불안한 여행 가이드처럼 우리에게 가고픈 곳을 재촉했다. 하지만 여행객들은 헐거운 일정이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쏙 들었다. 에어컨 바람 쐬며 서너 시간 동안 아가리만 뻥긋거릴 생각에 벌써 설렜다. 우릴 어디에 데리고 갈 기색이 보이면 성실한 여행 가이드를 마취 시켜 어디 묶어 놓을 작정이었다. 곧 카페에 도착했다. 구짱이 "뭐 마실래?"라고 묻자 우리는 네 마리의 가오나시들처럼 "아아.." "아아..."를 중얼거렸다. 곰돌이가 올라 앉아 있는 조각 케이크도 하나 시켰다. 윤니는 곰돌이를 보고 "어머 귀여워~ 아까워~"라고 하더니 대뇌피질부터 쑥 퍼먹었다. 역시 헷갈리는 사람이었다. 누가 카페인을 동력으로 일하는 직장인들 아니랄까봐 커피를 쥐어주니 서너 시간을 내리 떠들었다. 그 와중에 형이는 숙취를 호소했다.

  "어제 막걸리를 마셔서 그런가... 숙취가 있네."

  "? 막걸리는 낮에 아주 조금 마신 건데 과연 그것 때문에 숙취가 생긴 것일까?"

라니는 말을 바로 하지 않으면 뒤지는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팩트가 아닌 말은 반드시 바로 잡아준다.

  "한 잔 먹은 막걸리보다는 밤에 글라스로 때려부은 소주가 숙취의 원인이겠지?"

라니가 상사가 아니라 친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활력을 찾은 우리는 버스 터미널로 이동하기로 했다. 터미널은 읍내에 있고 읍내로 가려면 어제 올라온 꼬불꼬불 산길을 내려가야 했다. 10 정도 내려갔을까. 뭔가... 불길한 신호가  안에서 꿈틀거렸다. 꼬불거리는 산길과 멀미과 숙취의 3 콤보가 나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어제 먹은 회와 라면과 오늘 아침에 먹은 국밥과 커피가 날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쳐넣으면 어떡하라는 거냐! 내보내 달라!" 인구 과밀화에 분개한 음식물들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나... 속이 안 좋아..."

그 말을 한 순간 나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친구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오우야, 무섭게 왜 그런 말 해."

나의 창백한 낯빛이 내 말이 농이 아님을 증명했다. 내 속 사정과 상관 없이 애들은 떠들기 시작했다.

  "이제 그거는 우리가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어."

  "가위바위보 해서 지는 사람이 버스에서 빵떡이 앞자리 앉기로 하자."

매정한.. 우욱.. 새끼들... 형이는 즐거운 추억거리를 남기기 위해 힘겨워 하는 내 사진을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바로 화장실로 튀어가서 토를 했다. 검은색 토였다. 오전에 먹은 능이버섯과 아메리카노가 나오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여행을 검은색 토로 마무리하다니... 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오자 라니가 "어떡해... 능이버섯 아까워..."라며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버스 출발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터미널 근처를 산책했다. 반딧불이를 형상화했다는 상당히 공공기관스러운 조형물을 구경했다. 산책을 끝내고 시간 맞춰 터미널에 가니 버스가 와있었다. 버스에 타려는데 형이가 버스표 발권을 안 해서 무주에서 1박 더 할 뻔했다. 마지막까지 느슨한 여행에 긴장감을 주려는 형이의 마음이 갸륵했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고 구짱은 명절 쇠고 상경하는 손주손녀를 전송하듯 버스가 터미널을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버스에서 또 멀미를 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기역자로 목을 꺾고 자면서 갔다.


가족 여행도 좋고 연인과 하는 여행도 좋지만 즐거움으로만 따지면 친구들과의 여행을 따라갈 것이 없다. 친구란 뭔데 대체 이렇게 즐거운 것일까. 최희선 시인의 <반은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시에 '세계와 나를 연결해주는 / 나의 헐거운 반쪽들'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얘네들과 나는 헐겁게 연결돼 있다. 우리 사이에는 서류 관계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고 책임도 없다. 우리는 시간과 애정으로 이어져있다. 반쯤 우울하고 고독한 우리들은  헐거운 반쪽들 덕분에 신경쇠약이나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세계와 이어질  있다. 그래서 친구가 있다는  우리 존재들에게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손을 잡고 잎새뜨기를 하듯 살아가고 있다. 덕분에 가라앉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글을 빌어 전하고 싶다.

연행되고 있다. 사진을 보며 내 등짝이 실제로 저렇게 스펀지밥처럼 네모난 것인지 궁금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